“열일곱살 때 문산에서 기지촌 생활을 시작했죠. 너무 가난한 집이 싫어 가출했고, 갈 곳 없어 친구를 따라 클럽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술을 따르고 몸을 파는 생활이었죠. 업주와 미군에게 무수히 맞기도 했습니다.”경기 동두천시 중앙동 캠프케이시에서 27년째 기지촌 생활을 하고있는 L(45)씨. 술과 약물로 몸이 망가진 그는 오늘도 달러를 주는 미군을 유혹하러 골목으로 나선다.
“미군을 만나 애도 낳았지만 1년만에 온다간다 말없이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그 뒤 동두천으로 옮겼죠. 미군이 훈련을 가면 업주를 따라 훈련장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아이는 3년 전 미국으로 입양보냈습니다.”
인권국가를 자처하는 한국과 미국의 관할권이 2중으로 겹쳐져 있는 곳. 그러나 기지촌 여성들의 삶은 지구의 어느 후진국가 주민보다 비참한 법의 사각지대다.
또다른 기지촌이 있는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캠프스탠리 미군기지. 이곳은 ‘뺏벌’이라 불린다. 원래 배나무가 많아 뱃벌로 불렸지만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뺄 수 없다 해서 이렇게 바뀌었다. 10여개의 미군클럽이 있고 한국 여성만 60여명이 있다.
뺏벌에서 기지촌여성 선교단체인 ‘두레방’을 운영하는 유영임(柳英任·47·여) 원장은 “기지촌 여성의 70~80%가 약물복용이나 알코올중독에 시달리고 있다 ”며 “재활을 원하는 여성들도 태부족인 재활단체 상황과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경기 동두천, 평택과 부산 군산 등 전국 50여곳에 남은 기지촌의 여성들은 1만여명에 달한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이들은 갖가지 인권유린 상황에 노출돼 있지만 피해를 제대로 신고할 곳도 없다.
기지촌 여성운동단체 ‘새움터(대표 김현선·金賢善)’가 지난해 경기도 일대 기지촌 여성 250여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 따르면 구타 감금 성폭행 등 피해를 당한 여성이 67.5%에 달했지만 신고율은 28.7%에 그쳤다.
김대표는 “기지촌 여성들은 경찰에 신고해도 제대로 구제받을 수가 없어 아예 신고할 생각도 못한다”며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SOFA)의 개정을 비롯한 각종 법규의 개선과 이들의 재활을 돕는 복지시설의 확충 등 정부와 사회의 관심확대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사람을 사람답게] 90년대 중반이후 윤락여성 다시 증가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은 과거가 아닌 앞으로의 문제다.
미군 유흥가는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8일 미군의 상륙과 함께 인천항의 외곽지 부평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53년 휴전과 함께 생활능력을 잃은 부녀자들이 주한미군 주둔지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양공주촌’대신 자연스레 기지촌으로 이름이 변했다.
60년대에는 면세혜택 등 유·무형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울 이태원과 경기 동두천, 대구 군산 등 전국 62개지역의 윤락 여성수가 2만명을 넘어섰다.
80-90년대 꾸준한 감소추세를 보였지만, 90년대 중반이후에는 관광특구 지정, 동남아계 여성들의 유입과 IMF사태로 기지촌인구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 현재 기지촌 여성은 전국 50여곳의 1만여명으로 집계된다.
소멸될 것같았던 기지촌이 다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지만 92년 ‘윤금이씨 살해사건’, 지난달 ‘이태원 미군클럽 여종업원 살해 사건’ 등은 이 지역 인권이 전쟁 당시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드러냈다. 기지촌 여성들의 실태가 21세기에 새롭게 조명을 받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