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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기행] (9) 조선사절의 뱃길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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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기행] (9) 조선사절의 뱃길따라

입력
2000.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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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핑의 장연 등 화원을 찾았던 김상헌은 연이어 이웃고을인 장치우(章丘)의 이개선(李開先) 화원을 찾았다. 화원은 이름하여 ‘국화당’(菊花堂)」. 이개선(1502∼1568)은 장치우 출신의 명사로 1529년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고,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제사를 관장하는 정4품 벼슬) 등을 지낸 다음 낙향해서 30년 가까이 저술생활을 했다. 그는 희곡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명 나라 희곡사에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김상헌이 화원을 찾았을 때는 이개선은 이미 오래 전에 타계했고 손자인 이형(李衡), 이찬(李瓚)이 맞이했다. 이형은 과거의 1차 시험에 합격한 이른바 ‘거인’(擧人)이었다. 때는 늦가을, 국화가 한창인 계절이다. 김상헌은 ‘장구성중고이태복화원(章丘城中故李太僕花園)’이란 시 한 수를 읊었다. “한낮에도 문 닫은 이끼 덮인 호젓한 정원에(深院靑苔晝掩扉) / 그윽한 국화 향기 가을은 깊어가고(菊花秋色淨芳菲) / 서풍은 무정트라 탓하지 말게(西風莫道無情思) / 나그네 옷자락에 꽃내음 실어주네(吹送寒香上客衣).” 김상헌의 문집인 ‘청음집’(淸陰集) 권 9에 실려 있는 이 시와 똑같은 시가 중국 측의 ‘장구현지’ 권 11에는 작자 이형의 것으로 실려 있다. 김상헌이 이형 형제에게 준 시를 이형의 시로 잘못 안 것이다.수강교(繡江橋)는 장치우성 동문 밖 수강(繡江) 위에 놓인 다리로 산둥의 명교(名橋)의 하나이다. 수강은 큰 강은 아니나 맑고 깨끗하다. 특히 이른 봄의 눈 녹은 물이 아름다워 ‘수강춘창’(繡江春漲)이라 일컬어 이곳의 팔경(八景)의 하나로 꼽는다. 수강교는 명나라 때인 1480년에 세워졌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모기(毛紀)는 ‘수강교기’(繡江橋記)라는 글에서 다리의 제원(諸元)을 “돌다리로 9공(孔·아치), 길이 90자, 너비 20자, 높이 7자”라 했다. 또 “장치우는 바로 서쪽에 산둥성성(山東省城·지난(濟南)을 말함)과 접해 있고 동쪽은 칭저우(靑州)와 닿아 있는 요충지이다. 수강은 여러 고을을 내왕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그러므로 이 다리로 오직 장치우 사람들만이 큰 덕을 본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 해 수강교가 산둥 지역 교통에 중요함을 역설했다.

조선사절들도 수강교를 눈여겨 보았다.

이민성(1623년) : “돌다리로 너비는 6,7보(步·걸음), 길이 40여보, 다리 아래는 모두 홍문(虹門·아치)이다.”

홍익한 : “다리는 장치우성 동쪽에 있는데 돌 난간이 강 위에 쭈욱 걸쳐있고 다리 양쪽에는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고 가운데에는 차마(車馬)들이 거침없이 오간다. 참으로 굉장한 다리이다.”

김덕승(1624년) : “다리는 돌난간, 아래는 홍문 6개, 배들이 들락거린다. 다리 위는 큰 시장으로 물건은 지천이다.”

신열도(1628년) : “돌다리로 길이 40보 정도, 아래는 홍문 7,8개가 있다.” 자그마하고 조촐한 조선의 다리에 비해 인마(人馬)가 폭주(輻湊)하고 저자까지 이룬 중국의 큰 다리를 보았을 때 조선사절들은 적지 않은 문화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연행도폭’ 13번째 그림의 주제는 수강교이다. 다리 끝 강가에 ‘수강교(秀江橋)’란 큰 비석이 우뚝 서 있다. 글자는 홍익한이 기록한 대로 ‘繡江橋’가 맞는다. 500여 년이 지난 지금 수강교는 아직도 살아 있어 다리 구실을 하고 있다. 근년의 실측 기록을 보면 서쪽 홍문 1개가 묻혀버려 지금은 8개만 남고, 다리 길이 44.3㎙, 너비 7.1m, 높이 5m, 홍문의 너비 2.6∼2.8m, 교각 2.2m이다.

저우핑에서 칭양디엔(靑陽店)을 거쳐 장치우성까지는 34㎞, 옛날 조선사절이 지나간 바로 그 길이다. 1958년 장치우의 중심이 옛성 남쪽 10여 ㎞의 밍수이전(明水鎭)으로 옮기고 옛성의 지금 이름은 시우후이전(繡惠鎭). 남북조시대의 556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의 1958년까지 무려 1402년간 장치우현치(縣治)가 있었던 오래된 역사의 고장이다. 옛 장치우는 저우핑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 조선사절이 감탄하고 지나간 환상의 다리 수강교를 기대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눈앞에 가로놓인 다리는 고풍스러운 돌다리가 아니고 살풍경한 콘크리트 다리이다. 다릿가에 서 있는 사람 보고 물어보니 이 추악한 다리가 틀림없이 수강교라는 것이다. 나그네의 꿈이 산산이 조각난 셈이다. 전날 칭저우의 만년교를 본 필자는 눈 앞의 광경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1996년 5월의 어느 날 이곳 장치우시 인민정부 관리들이 갑자기 나타나 주민들의 애착은 아랑곳없이 500년 된 문화재 돌다리를 졸지에 부숴버리고 새 다리를 놓았다. 문화파괴의 추악한 현장이다. 수강의 물줄기는 지금도 맑아 동네 여인네들이 모여 빨래가 한창이다. 강가의 쓰레기 더미에 하얀 돌토막, 즉 뜯어낸 수강교의 잔해가 아직도 무수히 쌓여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문화혁명 때도 아니고 지금은 중국이 옛날처럼 어려운 때도 아닌데…. 장치우시는 지난시의 위성도시로 공업과 농업이 발달해 다른 곳에 비하면 월등하게 잘 나가는 지역이다. 필자는 아연실색했다. 제2수강교를 새로 놓는 방법도 있고, 수강교를 교통량 증가에 맞도록 보강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이리하여 인재(人災)로 수강교는 500여세를 마감으로 영영 지표 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다리 가의 한 리(李)모라는 노인이 자기 집에 잠깐 가자고 한다.

낯선 나그네더러 왜 가자고 할까? 의아해하면서 따라갔더니 낡은 수첩을 펴 보인다. 수첩에 1996년 5월 8일, 날짜가 적혀 있다. 바로 이 날이 수강교가 파괴된 날이다. 그는 이 한 많은 날을 수첩에 적어 놓고 이 슬픈 날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수강교를 찾아온 이국의 나그네에게 밖의 군중의 이목을 피해 몰래 수첩에 적은 날짜를 보여 준 것이다. 필자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인민(백성)이야말로 시대의 양심이요 문화의 파수꾼이다’. 필자는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총총히 건넜다.

그림에 등장하는 명나라 사람들은 소매가 넓고 긴 헐렁한 옷 즉 대수삼(大袖衫)을 입었고 머리에는 선비들이 쓰는 모자 아마도 방건(方巾)을 쓴 것 같다. 하인 같은 맨 앞에 선 인물은 짧은 바지를 입고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있다. 신분에 따른 명나라 사람들의 옷차림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림의 왼쪽 아래 끝에 ‘포숙아원’(鮑叔牙原)이란 한 비석은 장치우성에서 20㎞ 떨어진 룽산역(龍山驛·지금은 룽산전)에 있다. 이곳이 춘추전국시대 관중(管仲)과 함께 제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한 명신 포숙아(鮑叔牙)의 영지(領地)였음을 기린 것이다. 1930년, 31년 두 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신석기시대 말기의 검은 토기가 대량으로 발굴 출토됐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른바 ‘룽산(龍山)’ 문화이다.

■연행도

관동대 박태근 객원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씨가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사고에서 찾아낸 조선중기 기록화 ‘연행도폭’(燕行圖幅)은 1624년 조선 인조의 왕권을 승인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홍익한( 洪翼漢) 일행의 행적을 담은 국내 유일의 바닷길 연행 화첩입니다. 낙장이나 파본 하나 없는 25장의 그림은 평북 곽산군의 선사포(宣沙浦) 항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조선 중기 회화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

■[연행도기행] 장치우에 닿은 홍익한 명나라 두 생원과 시론

9월 24일 장치우에 닿은 홍익한은 자신을 찾아온 이 곳의 두 젊은이 이여두(李如杜), 이성룡(李成龍)을 만났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생원(生員)이다. 명나라의 생원은 우리 나라의 생원처럼 과거의 지방시험 합격자가 아니고 관학(官學)에서 수학 중인 학생을 말한다. 속칭 수재(秀才)라고도 한다. 당시 생원들은 기본적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지만 미래의 관료예비군으로 지역사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시론(時論)을 펴기도 했다. 홍익한은 요샛말로 튀는 대학생격인 두 생원을 반갑게 만나 오래간만에 시사 안보 문제를 논했다.

두 생원은 말한다. “조선은 예부터 예의의 나라인데 오랑캐 랴오둥(遼東)을 점령한 후에는 바닷길로 중국을 찾아오니 그 사대(事大)의 정성이 지극하다. 모문룡의 외로운 군대가 조선의 도움으로 적의 후방을 견제하여 적이 중국 본토를 넘보지 못하니 우리들이 지금까지 편안히 사는 것도 모두 조선의 힘이다. 이제 들으니 신왕(新王·인조를 말함)은 어질고 예의 밝아 모든 부정을 일소하고 새로운 정치를 편다 하니 중국이 랴오둥을 수복하는 길은 오직 조선의 도움 뿐이다.”

홍익한은 대답했다. “임진왜란 때 중국이 도와서 국토를 회복했으니 임금님과 온 백성이 모두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 다만 근래 우리 나라가 흉년이 잦아 나라와 백성이 모두 어려운데 지금 모문룡이 수 만 석에 달하는 군량을 요구하므로 매우 걱정스럽다.”

홍익한은 비록 젊은 외교사절이지만, 명나라와의 관계를 이념적으로는 공감하되, 현실적으로 조선에 큰 부담을 안겨주는 군사지원 문제는 국익차원에서 신중하게 발언하는 노련미를 보여주고 있다.

홍익한보다 1년 뒤 중국을 방문한 전식은 1625년 10월 21일 장치우에서 수재인 이성룡(李成龍), 고운루(高雲樓)를 만났는데 아주 호감가는 젊은이들이라 했다. 이성룡은 전해 홍익한을 예방한 바로 그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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