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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고사의 실제] 3월11일자, 3월18일자 논술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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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고사의 실제] 3월11일자, 3월18일자 논술 주제

입력
2000.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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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1일자와 3월18일자는 김영민(金榮敏) 연세대 교수와 손동현(孫東鉉) 성균관대 교수가 출제해 주셨습니다.(답안은 1,000자 이내)3월11일자 주제

(문제) 다음 제시문을 읽고 「지방문화의 의미와 중요성」이라는 제목으로 논술하시오. 분량은 1,000자 이내.

(제시문) 전통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현 한국의 상황은 봉건, 근대, 탈근대가 공존하는 혼란스러움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봉건적 구질서가 아직도 잔존해 있으며 근대적 합리성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 요즘 탈근대적 현상들이 대두되고 있다. 탈근대적인 형태의 한 특징은 경계의 불분명과 혼란일 것이다. 경계의 모호성은 세계화와 전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가속화하고 있으며, 종래의 지역단위에 기반한 문화의 개념은 그 유효성을 잃었다. 한국사회 내에서도 지난 30년 동안의 급속한 근대화와 서구화의 과정에서 지역 문화의 독자성은 국가 독점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중앙 중심주의, 서울 중심주의적 문화에 매몰되어버렸다.(중략) 지역성의 모호함과 지역 정체성의 불확실성은 현재 한국 지역사회와 문화의 위기를 유발시키고 있으며, 이는 과속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너무나 서구화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 전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의 것은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국제화와 지방화 시대에 어떻게 위치지워야 할까. 지방문화는 어떻게 재생될 수 있을까. (윤택림,「지방문화의 재창출과 문화의 주체」에서)

3월18일자 주제

(문제) 다음은 기계론적인 결정론을 주창한 고전적인 사상가 라플라스(1749-1827)의 글이다. 오늘의 우리의 과학적인 상식에 비추어 보면 그 내용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 없을 텐데, 이 글의 내용대로라면 인간의 행위도 모두 다 결정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과연 인간은 자유롭게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이 글의 내용을 연장하여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니면 이 글의 내용을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자유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인가? 과학적 지식과 인간의 자유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양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해 보시오.

(제시문) 자연 안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른다. 계절의 순환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법칙에서 비롯된다. 우연히 분 바람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가벼운 먼지의 움직임도 사실은 유성의 궤도처럼 확실한 법칙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은 자연이 생명을 만드는 모든 힘과 자연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그 지식이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분석할 만큼 광범한 것이 되면, 그 지식은 우주의 가장 커다란 움직임에서부터 가장 미소한 원자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법칙을 가지고 파악할 것이다.(폴 가이아르,「인간과 자유」에서)

입선자명단(7명)

경남 거창고=김송이 민족사관고=안세정 충남 서령고=송 학 경북 안동여고=이지영 경북 김천고=진종운 이화외고=강윤진 자양고=박지용

원고마감은 매주 월요일.우편:110-792 서울 종로구 중학동 14 한국일보 사회부 논술담당자앞 전화:(02)724-2313∼8 팩스:(02)739-0266

박혜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파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뿐,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는 인간이므로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녀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모순점이 없어 보인다. 전당포 노파는 존재할 이유도, 가치도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노파를 죽인다면 그녀의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있고, 가난한 학생이 공부를 계속할 수도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 대신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면, 그 노파를 살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노파가 사회에 해로운 존재라고 해도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그녀를 죽일 권리가 있는가? 「죄와 벌」작품 속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사상」을 만들어낸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사람이 있다. 비범한 사람, 즉 초인으로서 나폴레옹과 같이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범법 행위일 수 없고,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에 반해 오로지 자손을 퍼뜨리는 능력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은 초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초인인 자기가 전당포 노파를 죽여 하나의 발전을 이루는 것은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라스콜리니코프와 노파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이다. 한 개인이 다른 하나의 선과 악을 판단할 권리도, 생명을 빼앗을 권리도 없다. 설령 어떤 개인이 사회에 해가 되는 행위를 했을지라도 그것을 심판하는 것은 사회와 법이지 다른 개인이 아니다. 개인 자격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 다른 개인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막을 수가 없다. 또한 만약 그가 무죄라면 라스콜리니코프가 후에 느끼게 되는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가 결국 자신의 죄를 자수하고 변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속죄의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희생적인 소냐의 사랑에 감화되어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을 믿게 되고, 겸손함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인간으로 변해 간다. 인간성의 회복. 그것이야말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알고 반성하게 하는 이유이다.

비인간화 현상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사회의 한 부분이나 기계처럼 취급하고 있는 요즈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 제시하고 있는 선과 악, 인간의 내면 문제, 그리고 인간성 회복이라는 과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하다.

우수1

이진영

지구상에는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가지의 범죄가 발생한다. 물론 범죄는 사람들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고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해 둔 일반 규칙을 어긴 것이므로 정당화할 수 없다. 그렇게 볼 때 소설「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의 노파를 죽인 것도 범죄행위로 처벌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정작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이론상의 잘못은 인정하되 죄 자체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살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이유를 『하나의 죽임이 백 개의 생명을 대신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살 가치도 없고 오히려 해로운 존재인 노파를 죽여서 다른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바라는 공리주의적 입장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것이 인간의 생존권적 기본권에 어긋난다는 데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인간 존엄 사상은 사회의 기본 가치이며, 그가 주장하는 이론의 기초가 된다. 이는 그의 이론과 모순된다.

그렇다면 그가 속죄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우선은 자신의 이론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양심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 그는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자신의 이념을 실천으로 옮겼지만, 본질적인 인간성을 초월하지는 못했다. 이성이나 이념에 앞서 좀 더 근본적인 가치에 입각해서 진실한 자신 내부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 또 글의 앞부분에서 보듯이 종교적 신앙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된다. 종교적인 선(善)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그는 보다 본질적인 자아를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가 과학을 중심으로 엄청난 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을 요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론만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황페화시킬 우려가 있다. 더구나 그것이 이념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질 때는 더 큰 문제가 된다. 우리는 보다 도덕적인 인간을 위해 양심과 종교에 호소한다. 라스콜리니코프도 한 번 쯤 다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우수2

정연경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게 된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일하며 타인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일정한 규칙을 만들었다. 이들 다양한 규범들은 인간의 양심과 더불어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고 이에 어긋난 행동은 죄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은 이 인간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들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먼저 수적(數的)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노파의 모든 것을 「1」로 보고 이를 전 인류와 비교했을 때 하나의 생명이 수천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살인은 정당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다수(多數)편의 비교대상은 삶의 질인 반면 노파쪽은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전 인류의 행복도 소중하지만 생명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주인공은 수적 이익만 챙기다 생명의 소중함을 무시한 것이다. 주인공이 벌을 받아야 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에서 판단하고 행동했다. 노파는 우둔하고 간악해서 사회적 가치가 없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게다가 주인공이 사용하고자 했던 돈도 어디까지나 노파의 소유이다. 그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노파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이처럼 생명의 소중함을 등한시하고 자기 중심적인 주인공에게 가장 요구되는 속죄의 길은 인권 존중의 실천이다. 주인공은 결국 노파에게 주어진 살 권리, 언론과 행동의 자유 등 천부적인 인권을 침해한 것이다. 이런 인권 침해는 서로를 인간으로서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다. 이는 모든 범죄의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것이다.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법을 준수하기 앞서 인간이 사회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정신적 배려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속죄의 방법으로 타인의 인권을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죄와 벌」의 사건들은 결코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이 실제로 우리의 과거와 현실을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그 많은 「죄」들을 간접 경험하여 미리 해결책을 마련하고 인권 존중의 필요성 등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의 훌륭한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논술 강평] 작품 비평지식 돋보여

이태동

이번 주에 출제되었던 예시문에서 볼 수 있듯이 「죄와 벌」은 라스콜리니코프라는 대학생이 나름대로의 원칙에 따라 살인을 행하고 벌을 받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대학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심한 우울증과 무기력 속에 빠져 있던 라스콜리니코프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설정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인간을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누고 비범한 사람은 평범한 인간의 도덕성과 법률을 초월한 권리가 있기 때문에, 보다 나은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을 파괴하도록 허락받고 있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 결과 그는 비범함이 없이는 새로운 인류의 윤리는 정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살인을 단행했다. 결과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는 스스로 자신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소수의 비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나 같은 인간이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도록 허용될 것이다』라는 자만심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인류에게 봉사할 목적으로 보잘 것 없고 추악한 인간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할 것을 허용 받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초인적인 인간은 정신적으로 파멸하고 만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내부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주인공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속죄하는 방법은, 죄인이 범행 직후 스스로의 고뇌와 심리적 생리적인 고통으로 인해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는 것처럼, 살해 행위를 반성하는 인간의 본성과 양심 앞에 심한 갈등을 겪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이 작품의 주제는 「범죄와 살인 후에 살인자의 자기반응에 대한 분석, 즉 한 인간의 고뇌와 이에 대한 최후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러시아의 파우스트이다. …그는 자신의 논리에 제물이 되어 넘지 못할 선을 넘어 자기 만족을 추구하다가 끝내 비극적인 패배를 맛본다. 그는 죄를 범한 그 행위 속에서 구원을 찾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러시아인에게 있어서의 구원은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후의 자위적인 수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주인공을 시베리아로 보낸 것은 바로 이 해결을 얻기 위함이다.…』>

최우수작으로 뽑은 박혜란(서울외고)의 글은 책읽기를 통해서 작품 「죄와 벌」에 대한 비평적인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다.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범죄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와 속죄의 방법을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수준급 이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담고 있는 구성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데, 예를 들어 서론에 해당되는 도입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로 문장을 연결시킨 것은 글 전체의 구성을 흐트린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하다. 결론 부분 역시 논리보다는 교훈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어 다소 아쉬웠다.

우수 1로 뽑은 이진영(여수여고)의 글 역시 견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인간의 생명을 공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생존권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돋보이고 속죄의 방법으로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 역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글 가운데 단락과 단락을 연결짓기 위해 의문문을 남용한 것과 결론 부분이 교훈적으로 흐른 것은 흠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수 2로 뽑은 정연경(일본 세이센 국제학교)의 글은 위의 글 등에 비해 구성이 단단하고 문장 또한 훌륭하고 자연스럽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작품 「죄와 벌」에 대한 지식이 다른 글들에 비해 빈약해서 글의 내용이 너무나 일반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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