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파리는 요리의 천국이고 식도락가의 요람이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우리 음식을 바로 그곳, 파리에 소개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여간한 배짱이 아니면 엄두조차 못낼 일이었다.한·불수교 100주년이 되는 1984년. 연초에 나는 주프랑스 한국대사관과 여행사 등으로부터 파리에서 한국 요리 전시회를 여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 것 같아 거절했는데 한 열흘동안 졸라대니 어쩔 수가 없었다.
우선 평소 가까이 지내던 게오르규신부에게 그같은 뜻을 전하고 협조를 구했다. 소설 「25시」의 작가로도 유명한 게오르규신부는 한국 요리에 관심이 많아 가끔 한국에 오면 우리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가까웠다.
본격적인 준비는 행사 석달전부터 시작됐다. 전시할 요리는 전통요리와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을 마른 반찬류, 세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궁중요리 등이었다. 인삼요리와 약과, 다식, 육포와 어포, 부각, 견과류도 목록에 끼었다. 그릇도 전통미를 살려 구절판과 목기, 신선로 같은 것을 쓰기로 했다.
재료 정리와 마른 반찬류의 사전 조리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파리까지는 비행기로 18시간이나 걸리기때문에 중간에 김치가 시지 않도록 아예 냉장고에 넣어 날랐다.
행사는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텔 라운지에서 수백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폐백상 차리는 순서가 되면서 행사는 절정에 이르렀다. 가야금 병창과 국악이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사모관대와 원삼족도리를 쓴 신랑 신부가 큰 절을 하고 술잔을 올리자 우렁찬 박수와 갈채가 쏟아졌다.
게오르규신부는 우리가 만들어간 한복 바지와 저고리, 마고자를 입고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은 지도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나라지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는 나라입니다…』
행사가 끝나자 손님들은 뷔페 스탠드 앞으로 몰려나왔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프랑스인 몇 명이 현지에서 한식 식당을 운영하는 교포들에게 『같은 한식이라도 오늘 소개한 것과 당신네들이 평소 판매하는 게 왜 이리 다르냐. 앞으로는 오늘 맛본 음식들을 판매하라』며 원성을 쏟아내기도 했다.
나와 우리 요리원 강사 등 30여명은 음식을 만들면서 손에 기름 화상을 입고 손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고생을 했다. 하지만 파리에 우리 음식을 처음으로 소개한 그 때는 그 뒤로도 영영 잊혀지지가 않았다.
/하선정·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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