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학기행] (16) 김주영의 장편소설 '홍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학기행] (16) 김주영의 장편소설 '홍어'

입력
2000.02.29 00:00
0 0

[문학기행]김주영의 장편소설 「홍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리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몽환은 생의 격렬한 충동이고, 그 속에는 현실을 뒤집어버릴 만한 폭약이 장전되어 있지만, 정념으로 분출되지 못하는 그 꿈들은 현실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다. 밑에서 짓눌린 몽환들이 삶을 이리저리 몰아대서 삶은 늘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몰아서 사람들은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갈 수 있다.

이제는 대도시에 눈다운 눈이 쌓이지 않는다. 도시에 내리는 눈은 달리는 자동차 뒤로 휩쓸리면서 흩어지거나 염화칼숨에 녹아서 질퍽거린다. 김주영 소설 「홍어」 속에서는 눈이 내려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태백산 아래, 높은 재로 가로막힌 산간마을은 눈에 파묻혀 고립되어 있고, 버리고 떠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년과 어머니의 삶은 가난과 외로움과 대책없는 기다림 속에 유폐되어 있다. 밤중에 내린 눈이 온 천지를 다 덮어버려서, 하얀 아침의 시간은 갑자기 닥쳐온 종말처럼 가뭇없고 적막하다. 세상으로 드나드는 높은 고갯길들이 끊어지고 인기척이 사라지고 대들보가 내려앉고 대문은 눈에 묻혀 열리지 않는다. 겨우내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 삶은 속수무책으로 고립되어 있는데, 세상의 높낮이를 다 지워버린 설원은 그 위에 억눌림 없는 삶의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할 빈 화폭으로 펼쳐진다. 겨울 눈 속에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고,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는 말했다.

소설 속에서, 눈에 파묻힌 외딴 집 부엌 문설주에 말린 홍어 한 마리가 걸려있다. 산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이다. 부엌 연기에 그을린 홍어는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흉측한 몰골로 말라 비틀어져있다. 이 홍어는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표상이며, 대책없는 기다림의 세월 속에서 소진되는 박제된 시간의 미이라이다. 그러나 이 미이라 속에는 지느러미를 흔들며 흑산도 바다 속을 헤엄치던, 거칠고 싱싱한 자유의 꿈이 요동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이 미이라에 생명을 불어넣어 다시 바다로 돌려보낼 때, 유폐된 삶 속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난다. 미이라가 된 홍어의 꿈은 홍어와 닮은 가오리 연이 되어 겨울하늘에 치솟고, 안데스 산맥 위의 창공을 맴도는 콘도르가 되어 땅 위의 목표물을 노려보고 있다. 눈이 폐쇄와 해방의 이중성을 갖듯이, 말라 비틀어진 홍어의 그 버스럭거리는 불모성 속에서 억눌려지지 않는 생명의 힘은 고삐가 풀려있다. 몽환과 현실은 서로 뒤엉켜서 구별되지 않는다. 이 비논리적인 복합체가 삶을 부추기고 뒤흔들어서 사람들을 여기가 아닌 곳으로 몰아세운다.

「태백산 남쪽 막바지 기슭에 자리잡은」 소설 속의 산골 마을은 구태여 말하자면, 경북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 월전리, 그리고 그 이웃 마을인 영양군 석보면 일대이다. 여기는 작가 김주영의 유년의 고향이다. 그의 유년의 절박한 현실은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아버지가 가출한 집안의 외로움과 적막함이었다. 그 아이는 배가 고파서 땅에 떨어진 감꽃을 주워 먹으며 자랐다. 그 배고픈 아이의 몽환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산간 마을에 쏟아지는 폭설이 세상의 길과 높낮이를 지워버리듯이, 그 어린아이는 언어로 이 세상을 다 지워버리고 다시 그려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아이는 작가가 되었고, 환갑이 다 되어서 「홍어」를 썼다.

말린 홍어가 걸려있던 그의 유년의 초가는 진보면 월전동 2번지, 34번 국도의 길가 집이다.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인 구조는 옛 그대로이고 지붕은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34번 국도가 포장되기 전에, 길가에 잇닿은 이 집은 먼지를 눈처럼 뒤집어쓰고 있었다. 여기서 영덕, 포항쪽으로 가자면 황장재를 넘어야하고 대구, 안동 쪽으로 가려면 가랫재를 넘어야 한다. 포장 국도가 없던 시절에, 폭설이 쏟아지면 이 마을은 겨우내 고립되었다. 그리고 그 고립된 눈 속의 마을에서 배고픈 아이의 꿈은 말린 홍어를 조금씩 살려내고 있었다.

가장 궁핍하고 외로운 자리에도 인간의 몽환은 깃들 수 있다. 김주영의 경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러한 것이다. 소설 속의 소년과 어머니는 그 몽환의 힘에 의해 고여있는 삶의 벽을 부수고 바깥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충동이 서식하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리는 발전소처럼 힘센 자리이다.

『고향에 올 때마다, 내 유년의 꿈을 의탁했던 자리들은 자꾸만 없어져간다. 파출소의 종루도 없어졌고, 정미소도 없어졌고, 도살장도 없어졌고, 국민학교의 목조 교사도 없어졌다. 나는 이 소설에서 내가 자라나던 시절의 마음의 바탕을 들여다보고 싶었다』라고 말린 홍어가 걸려있던 고향의 슬레이트 집 앞에서 김주영은 말했다.

/글 김훈 편집위원

사진 오대근기자

■줄거리

가출한 아버지를 기다리는 산간마을의 소년과 어머니

산간 마을 외딴 집은 폭설로 고립되었다. 남편은 6년 전에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는다. 삯바느질로 연명하는 젊은 어머니는 열세살 난 아들과 함께 남편을 기다리며 긴 겨울을 견딘다. 부엌 문설주에 걸어놓은 말린 홍어는 그 기다림과 견딤의 표상이다. 눈이 내리던 날 열여덟살쯤 된 여자아이 삼례가 이 집 부엌에 숨어든다.

삼례는 발랄하고 충동적인 생명의 힘을 지닌 여자아이였다. 어머니는 삼례를 거두어 식구처럼 살아간다. 삼례는 막막한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던 어머니와 소년의 삶을 뒤흔들어 놓고, 소년은 삼례의 생명의 힘에 매혹된다. 삼례는 자전거포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나서 술집 작부가 되었다. 가출한 아버지는 패륜의 자식을 낳아서 이 집으로 들여보내고, 어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빈 젖을 먹이며 기른다. 소년은 난데없는 이복동생의 출현과 이 낯선 동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 배반감을 느낀다. 소년은 그 사랑이 허위임을 안다. 소년은 읍내 선술집 작부가 된 삼례를 찾아가지만 삼례는 그곳을 떠나고 없다.

아버지가 돌아온 날 아침에도 폭설이 내렸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오랜 기다림의 세월을 청산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소년은 삼례의 대구 주소에 의지해서 다시 삼례를 찾아 나설 작정이다. 아버지는 돌아오고, 어머니와 소년은 이 산간마을을 떠나 넓고 거친 세상으로 나아간다.

■홍어 속의 눈(雪)

세상이 눈으로 포근한데도

공허감으로 막막해 숨을 쉴수가 없으신가요

_그것은 눈의 궁전이었다. 가없는 설산 위에 세워진 눈의 궁전은 하늘의 가장자리 저편에서 보석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 주위에서 거대한 폭포수처럼 아무런 두려움도 두지 않고 소용돌이치고 있는 눈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_눈은 어떻게 해서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허함과 팽만함이, 그리고 소멸과 풍요함이 부담 없이 서로 오묘하게 어우러져 조화의 절정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산골마을에 내리는 눈만이 가지는 불가사의한 요술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완벽한 조율에 힙입어 어느 것이 소멸이며, 어느 것이 풍요인지도 판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_우리는 시린 눈을 훔쳐가며 하염없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앞가슴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호흡의 주기가 빨라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많은 눈이 쌓였는데도 오히려 가슴 속은 텅 빈 것 같은 공허감 때문에 호흡을 제대로 추스를 수 없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눈은 발작하거나 포효하고 싶은 아이들의 운명이나 시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눈이 발산하는 온화하고도 부드러운 순결성이 철없는 아이들의 시련을 떠올리게 하는지도 몰랐다.

_삽 한 자루 들고 부엌문 앞으로 나서긴 했지만, 눈앞이 아득할 만큼 내려 쌓인 눈 더미와 다시 마주치는 순간, 나는 암담했다. 이 설국 어느 곳에 요행으로 눈이 내리지 않은 별개의 공간이 없는 한, 눈을 치운다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어머니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金周榮 약력

·1939년 경북 청송 출생·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1년 「휴면기」로 등단, 「객주」 「천둥소리」 「화척」

「야정」 등 발표. 한국소설문학상(1983), 이산문학상(1996),

대산문학상(1999) 등 수상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