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도기행] 시집'조천록' 선물 中전역 소개홍익한 일행은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옛도읍인 린치현(치뻐시)과 창산(長山)현을 지나 1624년 9월 23일 저우핑(鄒平)현에 닿았다.
황허(黃河)와 창바이산(長白山) 사이의 산둥성 중부 내륙지역인 저우핑은 현재 인구 67만 600명, 아직 공업화가 덜 된 전형적인 농촌지대로 산둥성의 곡물·면화생산 중점기지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송나라 때의 대정치가이며 문인인 범중엄(范仲淹)의 고장으로 이름 높다. 조즙은 저우핑이 산둥성에서 가장 가난한 고을인데 물건은 서울보다 풍부하다고 해 조선시대 상품경제의 낙후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세월은 그때보다 400년 가까이 흘렀다. 필자는 낯선 저우핑 시내에서 큼직한 우리나라의 LG 대리점을 보고 조즙의 글이 생각났다.
범중엄은 아버지를 잃고 두 살 때 이곳 주씨(朱氏) 집으로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와 저우핑에서 성장해 뒷날 저우핑은 범중엄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현재 저우핑의 상징은 범중엄이며 거리 한가운데에 범중엄의 동상이 서 있고 심지어 범공주(范公酒)라는 술까지 있다.
범중엄이 어렵게 고학한 예천사(醴泉寺)를 찾기 위해 필자는 저우핑의 저명한 서예가이며 향토사가인 궈정천(郭蒸晨)씨의 도움으로 현지를 찾았다. 예천사는 4세기경 세워진 고찰(古刹)로 뒷날 범중엄이 이곳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더욱 이름 났다. 저우핑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11㎞, 동·서·남쪽 삼면이 창바이산 자락에 둘러싸인 아늑한 곳 칭양전 난천춘(靑陽鎭 南陳村)에 있다. 창바이산은 문자 그대로 나무 한 그루 없는 돌산이 겹겹이 이어져 그 웅장하고 기이한 산용(山容)은 조선사절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840년 일본 스님 엔닝이 덩저우 원덩의 신라 절을 떠나 오대산(五台山)으로 갈 때 4월 6일 예천사의 신라원(新羅院)에서 일박하면서 당시 예천사의 모습과 상황을 매우 소상하게 적었다. 우리는 엔닝의 귀중한 기록으로 예천사에도 신라 스님을 모시는 신라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날 엔닝의 후예인 일본군이 1937년 예천사를 불질러 없앤 것은 무슨 역사의 인과일까! 지금 예천사는 「대웅보전」이란 현판이 붙은 작은 법당이 덩그러니 남은 채 불상도 스님도 없는 폐사(廢寺)이다. 경내에 민가가 있고 주인은 올해 59세의 농민 류위안신(劉遠新)씨. 맑은 샘으로 이름났던 「예천」은 물이 말랐다. 뜰 앞의 우물 뚜껑이 비석 같아서 살펴보니 명나라 때(1554년)의 예천사 비석이다. 이곳 저곳에 고비(古碑)가 흩어져 있는데 절 앞 길목에 당나라 때(715년) 세운 고비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예천사의 고승 지공스님을 기리는 「대당제주장구현상백산예천사지공지비(大唐齊州章邱縣常白山醴泉寺誌公之碑)」이다. 이 비석은 그 옛날 신라스님들도 엔닝도 우러러보았을 것이다.
「연행도폭」 12번째 그림은 상단에 예천사, 가운데에 범문정공독서처(范文正公讀書處)의 정문(旌門), 하단에 호수인 수광호(光湖)를 3단 구도로 남북을 도치(倒置)하여 묘사했다. 절을 삼면으로 에워싼 창바이산의 울퉁불퉁한 돌산의 모습을 전통적 원근법인 삼원법(三遠法)으로 크고 작게 실감 있게 잘 나타냈고 또 예천사 건물을 정면으로 드러내고 탑은 반쯤 산자락에 가리게 묘사한 것은 「반현반은(半顯半隱, 반은 보이게 반은 안보이게)」의 묘(妙)를 살린 것이다. 호수는 수광호(중국 이름은 쉬산뻐), 둘레 30여리. 고깃배가 오가고 우거진 수초 사이로 무수한 철새가 날아드는 장관이 펼쳐진다. 호수 맨 앞의 오리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 뒤의 네 마리는 부지런히 앞놈을 따라가고 한 마리는 날개를 펴고 물위로 날아들고 또 한 마리는 날갯짓을 하며 막 날아오른다. 매우 꼼꼼한 사생(寫生) 솜씨이다, 절경인 수광호는 지금 물이 빠져 옛모습은 간 데 없고 일부만 남아 수고(水庫) 구실을 하고 있다.
저우핑 성내의 명소는 태복경(太僕卿, 말을 관리하는 종 3품 벼슬) 장연등(張延登)의 화원이다. 장연등은 뒷날 1632년, 공부상서(工部尙書, 정2품 벼슬)와 감찰기관의 으뜸인 도찰원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 정2품 벼슬)에 오른 이곳 출신의 명사이다. 조선사절 이민성, 조즙은 저우핑에서 화원을 그냥 지나쳤으나 홍익한은 명원(名園)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스님의 안내로 이곳을 찾기도 했다.
그 뒤 김상헌이 1626∼1627년, 베이징을 오가는 길에 저우핑을 지나면서 장연등 화원에 들러 시 2수를 남겼다. 언뜻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이 일이 뒷날 한중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하는 후일담을 낳게 된다. 김상헌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이며 또 당대 굴지의 명문장가였다. 그가 사절로 베이징을 오가며 엮은 시집은 이름하여 「조천록(朝天錄, 1권)」, 모두 136수를 담았다. 김상헌은 이 「조천록」을 베이징에서 귀국할 때 저우핑에 들어 장연등가(家)에 선물했다. 현재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저간의 깊은 사연을 알 수가 없으나 조선사절 김상헌과 저우핑의 명문 장연등가 사이에는 문학을 통한 뜨거운 우정의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장연등가에서는 보석같이 찬란한 사화(詞華)를 담은 김상헌의 시집에 감동한 나머지 이 책을 출판한 것이다. 김상헌도 자신이 기념으로 건네준 1권의 시집이 뒷날 중국에서 출판되어 크나큰 센세이션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김상헌이 중국을 다녀간지 36년 뒤인 청나라 때의 1663년, 대시인인 왕사진(王士 )이 그의 시를 높이 사서 온 중국에 알린 것이다. 왕사진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시론(詩論)으로도 저명했다. 지방에서 펴낸 시집 한 권이 어떻게 왕사진 눈에 띄었을까? 그 내력은 간단하다. 넓은 중국 땅이지만 왕사진의 고향은 저우핑의 바로 동쪽 이웃 고을인 신청(新城)이다.
그는 1663년 「논시절구 삼십이수 (論詩絶句 三十二首)」를 썼다. 내용은 3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중국 시가(詩歌)의 역사를 칠언절구로 읊은 매우 이색적인 시이다. 조조(曹操)의 아들 조식(曹植)부터 당나라 이 백(李白), 두보(杜甫) 등,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 중국시사의 슈퍼스타만 골라 담아 시평(詩評)을 곁들려 읊은 것이다. 32수 중 29번째 시는 유일하게 외국시인 김상헌을 읊어, 시인 김상헌을 기라성 같은 중국 역대 대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김상헌의 시 세계는 역대의 어느 중국 시인과 겨루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우뚝했고 왕사진의 섬세한 감성은 이국인이 쓴 1권의 시집에 황홀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29번째 시. 『엷은 구름 가랑비 속에 아씨 사당(祠堂) 뵈오니 (澹雲微雨小枯祠)/ 때는 난초 시들고 국화꽃 피는 팔월 달이라 (菊秀蘭衰八月時) / 어와! 조선사신의 말 좀 들어보소 (記得朝鮮使臣語) / 참말로 조선사람 풍월을 아는구려 (果然東國解聲詩)』 처음 2줄은 김상헌의 「묘도(廟島) 정박」이란 시의 처음 글귀이고 뒤의 2줄은 왕사진의 평어(評語) 글귀이다.
/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명지대·LG연암문고 협찬
■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중국 송나라 때의 대정치가요 명문장가이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겨우 두 살 때 창산현(長山縣, 현재 저우핑시엔 창산전)의 주문한(朱文翰)에게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이곳으로 와서 20대 초반까지 저우핑에서 성장했다. 출생지는 쉬저우(徐州, 장수성 북부지역)이지만 저우핑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저우핑 사람이나 다름없어 역대 저우핑 사람들은 범중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더욱 소싯적에 고학한 예천사(醴泉寺)는 범중엄 덕에 천하에 그 이름을 떨쳤다. 조선사절들도 저우핑을 지나면서 예천사와 범중엄이 공부한 곳을 꼭 기억했던 것이다. 범중엄은 1046년 중국의 유명한 누각인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썼는데 불과 350여자의 짧은 글이지만 천하의 명문으로 꼽힌다. 그 글귀 중에서 『괴로움은 모든 사람보다 내가 먼저 당하고 즐거움은 모든 백성보다 나중에 즐기겠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한 대목은 천고의 명구이다.
■ 왕사진(王士 , 1634-1711)은 저우핑현 동쪽의 이웃 고을인 환타이시엔 신청전(桓台縣 新城鎭) 사람으로 청나라의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고급관료이며 대시인이다. 그는 저우핑의 창바이산을 좋아해 오랫동안 머무르기도 했고 「장백산록(長白山錄)」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시와 산문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김상헌의 「조천록」을 읽고 깊은 감동은 받은 나머지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했다. 한중문화교류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30세 때 처음 김상헌을 소개한 후 중년에 쓴「지북우담(池北偶談)」에서 만년에 쓴「어양시화(漁洋詩話)」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끊임없는 김상현 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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