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족이야기] 롯데호텔 웨이터 서상록씨나는 딸이 여섯이나 되는 가난한 농가에서 막내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생전의 어머니 말씀으로는 내가 만일 아들 아닌 딸로 태어났다면 우리 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기로 했고, 당신은 죽기로 작정하고 소매자락에 항상 독약 비상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다행히 고추 달린 놈이 태어났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했을까. 어머니는 당신이 아들을 생산한 것이 믿어지지 않아 자다가도 일어나 고추를 확인하고, 논두렁에 나가 일을 하시다가도 집으로 달려와 확인하고 또 확인하셨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어머니는 늘 그리운 존재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어머니는 내 존재의 버팀목이자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준 스승이었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어떤 일을 하든 믿어주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너는 나의 희망이요 생명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리고 『머리가 큼직하니 틀림없이 천재』라며 늘 다정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누나로부터 한글을 배울 때 육개월이 지나도록 『가, 갸, 거, 겨』를 읽을 줄 몰라도 『천재는 천재인데 좀 늦게 깨려는가 보다』며 「바보」라고 놀려대는 누나만 호되게 나무라시곤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입학도 포기한 채 고향 경산의 읍사무소에 사환으로 취직했을 때도 어머니는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할 일을 할 사람이래이. 공부도 남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대이』하며 항상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
내가 정규 중고교과정을 밟지 못했어도 대학 갈 공부를 틈틈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심어주신 긍정적인 사고방식 덕분이었다. 첫 월급으로 받은 쌀 반가마를 의기양양하게 지고 왔을 때 기대와는 달리 소리없이 눈물만 쏟아내시던 어머니. 내가 고려대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러가기 하루 전날밤 엄동설한에 우물 옆에 촛불을 켜놓고 아들의 합격을 기원하며 알몸으로 샘물을 뒤집어 쓰고 절을 하고, 또 물을 뒤집어 쓰고 절을 하기를 반복하시던 어머니. 얼음 덩어리같이 차디차게 굳어있던 어머니를 부여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코끝이 시려진다.
어머님이 가신지 어언 20여년. 요즘도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어머님, 내 정말 잘했지요』라고 묻고는 『잘했어, 내 아들 최고야』하는 답을 들으며 스스로 힘을 얻곤 한다.
나에겐 어머니만큼이나 고마운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내 아내이다. 자식 자랑은 반 푼수요 마누라 자랑은 온푼수라고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 자랑이라면 기꺼이 온푼수 소릴 들을 각오가 돼 있다. 아내는 야생마처럼 질주해온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묵묵히 나를 도와준 조력자이자 버팀목이다. 가끔씩 내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을 때도 말없이 기다리고 참아주었던 아내. 이제는 초로의 나이가 된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푸근함과 넉넉함을 느낀다.
1997년 말 아무런 대책없이 사표를 내고 웨이터라는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려 했을 때도 아내는 큰 용기가 되어 주었다. 친구나 친척들은 너나없이 『대기업 부회장하던 사람이 할 일이 없어 「식당 뽀이」하냐』며 멸시어린 조소를 보냈지만 아내는 달랐다. 『늘 당신이 웨이터하면 잘 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니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세요. 여지껏 남의 시중만 받다가 시중 드는 사람이 되면 새롭게 배우는 것도 많을테고 인생의 폭도 더 넓어질테니, 기왕 하는 거 정식으로 잘 해봐요』
. 하루종일 서 있느라 다리가 퉁퉁 부어오른 채로 집에 돌아와 당장이라도 웨이터 생활 그만둘 듯 푸념을 늘어놓을 때면 아내는 밤이 새도록 나의 다리를 주물러주며 『당신이 시작했다가 좌절하면 우리 아들들이 당신에게서 배울 것이 없잖아요』하며 채찍질을 한다. 『이번에 국회의원 출마할까』했더니 『이왕 시작한 일이나 끝을 보고 다른 일을 찾으라』며 따끔한 충고를 해준 것도 나의 아내였다.
육십이 넘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머니 덕분으로 장년까지 버티고, 아내 덕분에 인생을 별 탈없이 잘 마무리 하고 있은 것 같으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롯데호텔 견습웨이터 겸 테이블매너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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