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몰락을 위태로게 묘사한 '아메리칸 뷰티'결코 아름답지 않다. 몰락한 가정은 추악하고 공포스럽다. 아름다운 것은 열다섯살의 육체와 얼굴이고, 그에게서 성적 환상을 느끼는 아버지의 입속에서 나오는 장미꽃잎 뿐. 그마저 서글프다. 「아메리칸 뷰티」란 제목은 역설이다.
때로 「사건」처럼 등장하는 영화나 감독들이 있다. 89년 울리 에델 감독의「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그랬다.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도 이들 영화 가계에 입적될 만한 영화이다.
거세된 남자. 레스터 버냄(케빈 스페이시)의 일상은 「발기불능」처럼 「안락」(?)하다. 그는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과의 섹스 대신 자위행위를 하고 직장에서는 해고 위협에 시달리지만, 제대로 흥분하지도 못한다. 아내는 무능한 남편을 무시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대신 부동산 판매여왕의 자리만이 그녀를 흥분시킨다. 부모를 경멸하는 딸 제인(도라 버치) 역시 외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재즈가 흐르는 식탁에 셋이 모인 것이 언제였던가.
「새로움」이란 그들의 마지막 재산인 나른한 일상의 안락마저 깨는 것이다.제인의 친구 안젤라를 보는 순간, 레스터는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휩싸인다. 오직 늙어가는 것만이 보장된 40대가 시간을 거스르려 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사건이다.
위태롭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깨진 가정만이 아니다. 가장 위태로운 것은 옆집에 사는 해군장교이다. 자신의 핏 속에 흐르는 동성애적 성향, 불쑥불쑥 일어나는 동성애적 성향을 지우기 위해 군인이 되었고, 아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나치를 숭배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순간 허물어진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가족, 혼외정사, 동성애.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일상이다. 제인의 남자 친구의 카메라에 담기는 이 모든 서글픈 현장은 누군가의 생일파티를 촬영하는 것처럼 담담하다. 붕괴는 이제 일상이 돼버렸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두번 아내와 정사를 나누고, 자녀와 규칙적으로 대화를 나눈다고 인간이 행복할까. 정말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스터가 가족의 단란한 한 때를 회상하는 순간, 그의 뇌속에 박힌 총알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한다. 유머조차 차갑다.
질문을 던지는 감독의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창공에서 시작한 독백이 침실로 와서 끝을 맺는 도입부의 내레이션은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며 「살아가는 것은 곧 사라짐」 이라는 무위(無爲)의 인생관과 닿아있다. 적절한 「팬터지」는 삶을 더욱 생경하게 만든다. 안젤라를 환상할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미꽃잎, 그녀와의 키스를 상상할 때 잎 속의 장미꽃잎은 캐롤린이 첫 외도 후 입은 화사한 장미꽃 무늬의 블라우스와 교묘한 배치를 이룬다. 그의 성적 팬터지는 아내의 성적 팬터지와 충돌할 때 파멸을 낳지만, 그 팬터지가 장미꽃잎처럼 향기롭다는 점에서 더 치명적이다. 세상의 슬픔은 때론 화려한 장밋빛일 수 있다. 올해 아카데미 8개부문 후보에 올라있다. 오락성★★★★ 작품성 ★★★★☆(★ 5개 만점, ☆은 절반. 한국일보 문화부 평가)
사진
추락하는 것은 아름답다? 「아메리칸 뷰티」는 붕괴하는 미 중산층의 삶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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