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컴의 면도날」은 위험하다』21세기 세계정치를 문명과 문명의 대립과 충돌 가능성으로 예측한 미국 국제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론은 탈냉전시대 국제관계를 분석하는 첨단의 유행이론이다. 그의 주장은 엄청난 세계적 관심과 논란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4년 전 번역된 그의 책은 대학가의 필독서처럼 읽히고 있다.
독일의 국제정치학자 하랄트 뮐러(51·사진)는 헌팅턴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그는 헌팅턴의 이론을 (종교적) 근본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 나치스를 학문적으로 정당화한 칼 슈미트의 우적이론(友敵理論)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현 세계질서의 맹주인 미국의 입장을 반영할 뿐인 결함 투성이의 도그마적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의 저서 「문명의 공존」(푸른숲 발행)은 갈등과 전쟁보다는 대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오컴의 면도날」은 학문의 세계에서 가설(假說)이 적을수록, 절약적인 이론일수록 각광받는 현상을 후기 스콜라 철학자 윌리엄 오컴의 이름을 따서 이르는 것. 하랄트 뮐러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엉터리 면도사가 오컴의 면도날을 휘두른 것』이라며 『이런 류의 이론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비판한다.
헌팅턴은 세계의 문명을 종교를 구심점으로 해 서구기독교문명, 동방정교문명, 이슬람문명, 유교문명, 힌두문명, 불교문명으로 나누고 다시 일본문명, 아프리카문명, 라틴아메리카문명 등을 독자문명권으로 설정했다. 그의 문명충돌론은 이러한 문명간의 대립이 서구기독교문명이 주도하는 현 세계질서에 위협이 된다는 것. 하랄트 뮐러는 그러나 헌팅턴의 이론적 단순성은 물론 그가 제시한 수많은 사례들에 구체적 반증을 들며 그 허구성을 입증하려 한다. 헌팅턴의 주장은 특히 통계에 바탕한 이슬람문명의 폭력성과 이슬람-유교 동맹의 가능성 등에 집중돼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계선은 피에 젖어있으며 그 내부 역시 그렇다』는 헌팅턴의 주장에 대해 하랄트 뮐러는 『이슬람문명은 다른 어떤 종교와 비교해도 육로 경계가 현격히 길다. 헌팅턴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 즉 육로 경계를 사이에 둔 국가들은 갈등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확인해줄뿐 새로운 사실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는 또 헌팅턴이 중국·북한의 시리아에 대한 미사일·포대 제공 사실을 들어 유교-이슬람 동맹의 가능성을 말한데 대해, 미국의 대 이슬람 국가 무기 판매량이 중국·북한의 판매량의 10배가 넘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고 맹공했다. 나아가 오늘날 이란의 가장 중요한 민간 핵기술 파트너는 러시아인데 이것은 그러면 정교-이슬람 동맹이냐고 되묻는다. 보스니아분쟁에 대한 헌팅턴의 분석도 『「피비린내 나는 이슬람」이라는 편견 때문에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랄트 뮐러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세계를 단일하고 결정적인 대상으로 재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며 『국제관계이론은 국민경제의 전세계적인 자본주의화, 생태시스템의 상호연관, 국경을 초월한 통신 증가, 기업과 비정부기구의 행위 등도 올바르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헌팅턴의 이론에 내재한 미국중심적 입장을 비판하며 『강자가 먼저 약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에게 요구되는 바이며 세계의 협력은 「중국의 도전」이나 「일본주식회사」「이슬람 근본주의」에 달린 문제라기보다는 서구사회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하랄트 뮐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국제관계학 교수이자 헤센 갈등 및 평화연구소장이다. 그는 「문명의 공존」 번역출간에 때맞춰 23-25일 방한, 국방연구원, 세종연구소 워크숍에 참석하고 김경동 서울대교수와 대담할 예정이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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