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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소설쓰기 혹은 生을 건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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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소설쓰기 혹은 生을 건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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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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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저러니 해도 소설쓰기란 결국,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거나 진지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기 둘 중 하나다』2000년 올해로 전업 9년차(?)가 된 전업소설가 구효서(42)씨는 그의 단편소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1993년)에서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명쾌한 순환논리로 소설쓰기란 좌우지간 하찮은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여의도 SBS방송사 정문에서 그를 만났다. 구씨는 요즘 손숙씨가 진행하는 한 라디오프로그램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서 그는 우리 문화 전반에 관해서 소개하고 논평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오늘은 「박하사탕」의 감독 이창동씨와 대담을 나눴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다고 하는 그 영화를 구씨는 어떻게 보았을까. 진지했을까, 하찮았을까. 구씨는 바로 얼마 전에 「악당 임꺽정」이라는 두 권짜리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민중의 영웅이자 의적으로 알려진 임꺽정, 그의 대선배 홍명희가 그토록 사무치게 되살려냈던 임꺽정을 그는 악당으로 그려냈다. 진지함과 하찮음의 사이와 의적과 악당의 거리.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은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대전시내를 지나 충북 옥천으로 향하는 30번 국도 변에 있다. 지명으로는 대전시 동구 신하동. 대청호가 국도를 바로 사이에 두고 눈앞에 펼쳐져 있고, 마을 뒤로는 백골산이라는 낮지만 다소 가파른 산자락에 자리잡은 곳. 대전광역시에 편입되기 전에는 충남 대덕군 동면 방축골 혹은 절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나는 자고 일어나 대청호 수면 위의 물안개를 굽어보다 아침을 먹었고, 입을 벌린 채 수면을 바라보다 점심을 먹었고, 놀을 반사하는 수면을 또 바라보다 저녁을 먹고 잤다. 감나무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구씨는 이 소설에서 한 보름여 머물렀던 이 마을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전업 2년차가 되던 여름 그는 서울을 떠나기로 한다. 『한 해에 단편 한 10편 쓴다고 하자, 문예지에 연재도 한다고 하자, 그러면 800만원이다, 일년 열두 달을 800만원 가지고 살 수 있어? 나는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아내는 애 둘 데리고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떠났다. 『잘 팔리는 소설 한번 구상해보려고』

그는 잘 팔리는 소설 구상은커녕, 이곳에서 대청호 물빛과 은빛 갈대꽃을 바라보거나, 자신이 머물던 도심정사(道心精寺)라는 절의 요사채에서 빗물 고인 돌절구에 장구벌레가 몇 마리나 빠져있나 헤아리거나, 방 앞마당에 자라는 고염나무와 배롱나무를 눈이 멀 정도로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일로 날을 지샜다.

구씨는 여기서 백골산을 오르내리다 하루는 거기 핀 「야생화들을 꺾어다 삭막한 방에 꽂아놓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마을에 버려진 빈 깡통 70여개를 주워 그 꽃을 꽂아둘 기명(器皿)으로 쓰기로 한다. 무위(無爲)의 한가운데서 야생화를 거두어들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서울을 떠난 전업소설가의 소설 쓰기에 다름아니었다. 평론가 김윤식씨의 해석대로라면 『「나」에 있어 가장 절박한 것, 「나」의 소설 쓰기에 있어 가장 소설스런 계기란 한 송이 꽃을 담을 깡통이었다』

그러나 기명으로 쓸 깡통의 마개를 딸 깡통따개를 마을 어디를 돌아다녀도 구할 수 없었다. 그가 깡통따개를 구하러 갔던 구멍가게 동면상회(지금은 「대청수퍼」로 이름이 바뀌어있었다)에서도, 마을 아낙들 누구에게 물어도(그들은 구씨를 정신병자 취급했을밖에). 그래서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이다. 결국 대전시내까지 나가 깡통따개를 구해온 그는 「탈출사(脫出士)」로 등장하는 한 사내가 호미로 모조리 깡통을 따놓은 것을 발견한다. 꽃을 깡통에 담았지만 며칠 뒤 그는 『아이가 낚시바늘을 삼켰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서울로 돌아간다…

구씨의 이 작품은 이른바 「소설가소설」이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하찮게만 보일, 소설가들이 자신의 자질구레한 일상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한 소설가소설은 90년대초 우리 문단에 열병처럼 번졌었다. 교사에서 출판사 편집장으로, 다시 전업작가로 나선 구씨를 비롯해, 역시 교사였던 박상우, 기자였던 김소진, 기업체 직원이었던 이순원씨 등이 저마다 이런 류의 작품을 한두편씩 발표했다. 「깡통따개가…」에 윤형으로 나오는 윤대녕씨도 마찬가지. 왜 이들은 「하찮은」 소설가의 삶을 소설로 썼나.

이전 연대까지만 해도 소설이란 구원이자 해방이자 정의이자 통일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이었다. 소설 쓰기란 곧 이러한 이념을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구씨가 전업작가로 나선 바로 그 시점을 경계로 소설의 이런 위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들은 함정에 내몰린 들짐승의 처지였다. 나약했다. 「낚시바늘을 삼킨 아이의 처지」나 다를 바 없었다. 구씨는 바로 이 시점에서 「깡통따개가…」를 썼고 한 시대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대청호의 물안개와 그 마을에 핀 이름 모를 들꽃들, 그리고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탈출사」의 상징을 빌러 아름답고도 유의미하게. 그 모습은 하찮은 소설가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거대한 전환의 시점에 선 한국사회 정신적 공황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 마을은 여전하다. 당초는 산꼭대기에 있다가 대청호 건설로 수면 바로 곁에 위치하게 된 수몰마을. 가끔 백골산에서 장작을 캐 온 촌로가 수레에 나무짐을 싣고 「신작로」를 우쭐우쭐 가로지르며 지날 뿐 차량은 몇 분에 한 대꼴로 지날 정도로 드문드문하다. 그 국도는 끝이 안보이게 S자로 뻗어있다. 『소설이 그렇게 하찮은 것이오?』 돌아오는 길의 질문에 구씨는 대답했다. 『그건 말장난이지… 소설은 체세포와 같은 것 아닐까요. 그 미세한 체세포 하나에 인체의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지요. 소설은 그 체세포처럼, 인간사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 호구지책의 고달픔이 소설가엔들 왜 없으랴

1992년부터 1993년까지였을 것이다. 나는 나를 꼭 닮은, 나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인물이 등장하는 단편들을 여럿 썼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이 표제작으로 되어있는 내 세번째 창작집에는 11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이 중에 7편에 나와 나이가 같은 가난한 전업소설가가 등장한다. 물론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그때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하창수도 그랬고 박상우도 그랬고 이순원과 김소진도 그랬던 것 같다. 함께 모여 앉아 전업작가의 고달픔을 토로했던 것도 아닌데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자신들의 얘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그래선지 한때 「소설가 소설」이란 말까지 유행했었다.

소설가가, 그리고 소설가의 일상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자신의 얘기일듯 싶은 글을 써서 귀한 지면을 낭비하느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고, 독자가 할 일이 없어서 전업소설가의 푸념이나 들어야 하느냐는 혹독한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이른바 「소설가 소설」을 가장 줄기차게 썼던 나는 그런 빈축과 비난이 왠지 나를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내 소설은 소설가의 일상이 대단하거나 별다르지 않을뿐더러, 대단하거나 별다를 수도 없다는 걸 알리거나 스스로 그렇게 인식함으로써 자칫 문화계몽주의자나 문학권위주의자의 너울을 쓰기 쉬운 소설가라는 신분을 반성적으로 자문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푸념으로 읽혔을지는 모르나 당시 젊은 전업작가였던 자들은(적어도 나는) 하루하루의 삶이 절박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꼭 먹고 사는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중과 노동과 통일로 들끓던 80년대가 저물자마자 들이닥친 포스트모더니즘과 오렌지족과 대량소비의 열풍 앞에서, 사회와 삶을 어떻게든 적절히 반영해야 할 책무를 떠맡은 작가들은 최근의 IMF 앞에서 온 국민이 그랬듯 아연실색, 일종의 의식공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를 묻기 전에 소설가란 신분의 정체성에 대해 반성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어쩌면 그 시절의 당연한 요구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젊은 작가들은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전업을 선언했던 사람들이었으니 자신의 정체성을 총체적으로 반성하는데 생활의 곤궁함을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설가가, 혹은 소설이 사회를 이끌고 향도(嚮導)하는 막중한 역할에만 충실해야 하는 것이냐는, 조금은 피로하고 자조적인 소설적 물음들이 결국은 거대 서사에 이끌려만 가던 80년대의 문학 전반에 문제를 제기한 결과를 낳은 건지도 모른다. 90년대의 벽두에 서 있던 젊은 전업소설가들에겐, 타당과 부당의 논점을 떠나 소설과 소설가의 생존을 위한 나름대로의 고달픔이 있었고, 그것은 소설가를 급변하는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 함께 휩쓸려 분열될 수밖에 없는 일존재(一存在)로 그리게 했을 것이다.

■ 구효서 연보

·1957년 경기 강화 출생

·목원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1994년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제2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작품집 「노을은 다시 뜨는가」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장편 「늪을 건너는 법」 「비밀의 문」 등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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