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원 기사실이 요즘 너무 썰렁하다. 옛날 관철동 시절에는 대국이 있건 없건 으레 기사들이 기사실에 「출근」해서 동료들과 기보 연구를 하거나 연습바둑을 즐기곤 했는데 1990년대 중반 홍익동으로 기원 건물을 옮긴 후부터 눈에 띄게 기사들의 발걸음이 뜸해 지더니 IMF를 거치면서 요즘은 아예 개점휴업 상태. 두어 달에 한번 예선 대국이 개막되는 날에야 겨우 기사들의 얼굴을 구경할 수 있을 정도다.그러다 보니 새해 들어 바둑팬들의 관심을 모으는 빅게임들이 한국기원에서잇달아 열리고 있지만 막상 대국 현장에서 낯익은 프로들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기껏해야 바둑 TV 해설을 맡은 기사들 두어명이 업무차 들러서 대국 진행 상황을 지켜 보는 것이 고작이다.
프로기사들이 기원에 발길을 뚝 끊은 이유는 간단하다. 대국이 없기 때문이다. IMF 이후 몇몇 기전이 폐지 또는 축소된데다 그나마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 치여서 대부분 중견기사들이 설 땅이 없어진 것이다. 심지어 한 달에 한 판 대국하기 어려운 경우까지 등장하고 있다. 기사들의 기원 출입이 이처럼 뜸하다 보니 기사회에서 중요한 일로 회의 한번 열려고 해도 정족수를 채우기가 어려워 예선 대회나 승단 대회가 있는 날 그것도 거마비를 1인당 5만원씩이나 지급해야 간신히 성원이 될 정도라고 한다.
프로기사들이 오랫 동안 실전 대국을 하지 않으면 자연히 승부 감각이 무뎌지고 전력의 급격한 저하를 초래, 더욱 성적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에 따라 그동안 한국 바둑의 허리 역할을 해왔던 30대 이후 세대가 빠른 속도로 승부 현장에서 물러나고 있다. 바둑계가 머리와 꼬리만 있는 기형적인 상태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허리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으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이창호 조훈현 등 몇몇 정상급 기사가 아무리 발군의 실력을 가졌다 해도 중간층이 두텁게 받쳐 주지 못하면 오래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최근 각종 국제 기전에서의 뜻밖의 참담한 결과가 바로 이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또 새해 바둑계를 뒤흔들고 있는 루이나이웨이 돌풍도 그 원인을 짚어 보면 국내 중견 기사들이 미드필드에서 루이의 돌진을 적절히 차단하지 못하고 모두 맥없이 허물어져 버린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만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루이가 언제 노는거 본 적 있나. 남편이랑 하루 종일 바둑 공부하는 게 노는 거다』(서봉수) 『루이가 국수위를 차지하게 되면 우리 나라 남자 기사들에게 가위를 하나씩 선물해야 할 것』(조남철) 이라는 조크성 발언이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요즘 한국기원 기사실 풍경이다. /박영철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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