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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의 생활사, 소설읽듯 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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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의 생활사, 소설읽듯 술술...

입력
2000.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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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 이야기 9-12(조선전기편)「굶어 죽은 시체가 쌓이면서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체의 살을 떼어먹었으며 시체의 골까지 뻐개 그 진물을 빨아 먹은 뒤 바로 그 자리에서 엎어져 죽었다」 공포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한국사 이야기」 제 11권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중 한 대목이다. 유형원의 「지봉유설」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원로 재야사학자 이이화(62·李離和)씨의 「한국사 이야기」는 살아 있는 우리의 과거다. 그가 조선 전기편 4권을 동시에 펴내며 필생의 역작인 「한국사 이야기」 집필의 대미를 향해 가고 있다.

왕조 중심의 정치사와 사건사 서술을 탈피, 이름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생활사·문화사가 전체의 반을 차지하는 「민본주의 한국사」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방불케 하는 문장, 풍부한 사진 자료 등의 덕택에 이 책은 역사서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이번에 출판된 4권(9-12권)은 조선 전기편. 저자는 이 책에서 임진왜란은 조일(朝日)전쟁으로, 병자호란은 조청(朝淸)전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엄연한 침략전쟁이자 국제전쟁이었던 두 전쟁을 동아시아사라는 보편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노학자의 요청이다. 또 국보 1호는 남대문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함께 출간된 나머지 세 권(12-14권)은 「조선의 건국」 「왕의 길, 신하의 길」 「국가 재건과 청의 침입」. 성리학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아래 불교 무속 등 주변 종교는 어떻게 존속했는지, 고추와 담배 등 외래 작물은 기존 문화 체계에 어떻게 흡수돼 갔는지 등 역사학적 문제가 오늘의 현실로 살아 온다.

「여성」이란 문제를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 낸 점은 또 하나의 큰 특징이다.조일전쟁 때 조선 여성들의 강간 피해를 낱낱이 기술했다. 당시 왜군이 전술적으로 현지처를 합법적으로 장려하고 해당자에게는 부지미(扶持米)란 이름으로 경제적 지원까지 제공했음도 알 수 있다. 또 전후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그들이 혼인을 기피당했을 뿐 아니라, 자살까지 강요받은 사실도 일러준다.

본문 옆 자투리 공간에는 당대의 역사에서 파생된 아리송한 어휘들을 간략히 설명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예를 들어 「갈보」란 비어는 갈(蝎:빈대)+보( 甫(이름 밑에 붙이던 애칭), 즉 「빈대같은 여자」라는 뜻으로 생겨났다. 또

「화냥년」이란 환향녀(還鄕女), 즉 고려 때 원나라에 잡혀 갔다 그곳에서 몸을 팔아 연명한 후 고향에 돌아온 일부 여인네들을 가리키는 말의 발음이 변한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지금까지 야담처럼 술렁술렁 읽어 온 이야기들이 실은 모두 정사(正史)였음을 알려주는 상세한 연표가 실려 있다.

조선편의 출판 소식에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이우성씨는 『역사 서술의 신지평』이라며 『21세기 국민역사 독본의 쾌거』라고까지 평했다. 미술사학자 유흥준씨는 『우리 역사 속 민(民)의 역량을 남김없이 보여준다』며 『이 책은 결국 이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강만길 전 고려대교수는 『소설처럼 쉽고 재미있으면서 역사를 보는 일관되고 뚜렷한 관점이 서 있다』고 평했다.

이 시리즈는 평생을 한국사 연구에 바쳐 온 이씨 필생의 노작이다. 그는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비평」 편집장 등의 활동을 접고 지금은 이 시리즈의 완성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경기 구리시 자택에서 컴퓨터로 밤부터 새벽 3-4시까지 작업을 마친 뒤, 정오까지 잠으로 피로를 푸는 생활이다. 최근 들어서는 왼 팔에 마비 증상이 나타나,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1998년 6월부터 40년 역사연구의 결정판인 고대사 부분 4권을 시작으로 앞으로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1945년)까지 각각 4권씩 더 집필해 대하 시리즈 「한국사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할 계획이다. 현재 시중에 고려 시대까지, 8권째까지 배포된 이 시리즈는 중고생 독자들을 중심으로 모두 12만여 부나 팔린 스테디셀러다. ■지금까지 나온 이이화씨의 「한국사 이야기」

1권: 우리민족은 어떻게 형성됐나

2권: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를 찾아서

3권: 삼국의 세력다툼과 중국과의 전쟁

4권: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5권: 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

6권: 무신의 칼 청자의 예술혼

7권: 몽골의 침략과 30년 항쟁

8권: 개혁의 실패와 역성혁명

한 우물 판 재야 사학자 이이화씨

■이이화 누구인가?

이이화씨는 1937년 주역 사상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의 넷째 아들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철저히 한학 교육을 받던 그는 몇 차례 접한 신문물에 큰 충격을 받고, 16세에 무작정 가출해 풍찬노숙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아원에 들어가면 신식 학교에 보내준다는 말만 듣고 행동으로 옮겼다. 1년 동안 부산의 고아원 생활 덕택에 학교를 접한 그는 새 문물의 기대에 들떴다. 여수 보육원을 나와 가짜 중학교 졸업장으로 광주고에 응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문순태 이성부 등 작가들과의 교우는 이 때 시작됐다. 당시 그의 생업은 여관 사환이었다.

장학생으로 서라벌예대에 진학한 그는 행상을 하며 대학을 다녔다. 결국 졸업은 하지 못했으나, 천승세 김주영 등과 연분을 쌓았다. 이후 성균관대 설립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의 소개로 성균관대 청강 생활 3개월. 「불교시보」 「동아일보」 「창작과 비평」 등을 통해 필명을 높여가던 그는 1985년 한길사 주최 역사강좌를 계기로 역사대중화의 기수로 떠올랐다.

그는 국사학 연구의 공을 인정받아, 서울대 규장각, 성심여대 등지에서 일하기도 했다. 또 역사문제연구소장, 「역사비평」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쉼없는 집필 활동으로 강단 역사학의 허점을 지적했다. 이씨의 짧은 정규 교육 기간을 문제 삼은 기존 교수들의 반대로 정식 교수 자리와는 인연이 없었다.

독특한 이름은 주역 팔괘에 따른 것. 이(離)란 이괘(離掛)에서 나왔고, 화(和)란 돌림자다. 성리학이라는 학문적 대세로 비쳐 보나, 발음상으로 보나 상식적인 남자 이름은 아니다. 주위로부터 개명하라는 권유를 수없이 받았음에도,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일한 유산이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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