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 국내 프로바둑계에 새로운 화두가 등장했다. 「여성」이다. 남성들의 위력에 밀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여성기사들이 전례없는 막강파워를 과시하며 반상에 성(性)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남녀 간의 높은 장벽을 단숨에 허물어 뜨릴 듯한 기세다. 「반상의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은 이미 성의 경계를 초월해 남녀 최정상권에 올라섰고, 이에 질세라 신예 여류기사들도 최근 무서운 성장속도를 보이며 하나둘씩 대반란에 가세하고 있다.반란의 선두주자는 제1회 흥창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조혜연(15) 2단. 1997년 입단 첫해 9승 16패, 1998년 13승 23패, 지난 해 23승 23패로 이렇다하게 두각을 나타내본 적이 없는 조 2단은 이번 대회를 통해 일약 「월드 스타」로 발돋움했다. 보해컵(흥창배 전신) 우승자인 중국의 강호 펑윈(豊雲)9단과 중국 전국개인전 우승 경력이 있는 화쉐밍(華學明)7단이 그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고, 세계여류최강 루이 9단도 「어린 애 팔목 비틀기」정도의 가벼운 승부로 예상됐던 결승전에서 1패의 수모를 겪으며 혼쭐이 났다.
바둑계는 조 2단의 등장으로 중국→일본→한국 순으로 뚜렷이 서열화돼 있던 세계여성바둑의 세력판도가 단숨에 지각변동을 맞게됐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조 2단이 조훈현 9단(9세 7개월), 이창호 9단(11세 1개월)에 이어 역대 3위의 최연소 입단기록(11세 10개월)을 갖고 있는 「천재형」 기사라는 점을 들어 향후 성장가능성에 대해서도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입단 연령이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천부적 기재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라며 『그동안 국내 성적이 저조했던 조 2단의 경우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본격 실력 발휘를 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기원 연구생 시절부터 남자기사에게 유독 강한 면모를 보여온 입단 3년차의 새내기 박지은(17) 2단도 여성 반란부대의 기대주로 손꼽힌다. 힘이 강하고 공격에 능해 「여자 유창혁」이란 별명을 지닌 그는 올들어 관록의 이영신(23) 2단을 종합전적 2승1패로 꺾고 제1기 여류명인전 초대 패권을 차지, 여성바둑 세대교체의 주역이 됐다. 이달 초 열린 ⓝ016배 제8기 배달왕기전 예선에선 나종훈 4단과 양건 4단을 잇따라 꺾으며 현재 4연승을 기록중이다.
지난 해엔 KBS바둑왕전 예선에서 「영원한 명인」서봉수 9단을 제압,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는데다 승부근성이 남달라 올해부턴 주요기전 본선무대에도 진출, 남성기사들을 자주 괴롭힐 것으로 예상된다.
이지현(21) 2단은 지난 해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날고 기는 남자 일류기사들도 넘보기 어렵다는 신문사 주최 본격기전(기성전)의 본선 진출권을 따낸 재목이다. 여류국수전에선 루이 9단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번 흥창배에서는 일본 최강 고바야시 이즈미(小林泉美)를 격파하며 8강에 올랐다. 지난 해 성적은 26승 1무 25패.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승리의 60% 이상은 남자기사한테서 따낸 것이다.
권갑룡 6단의 친딸인 권효진(18) 2단 역시 체계적인 바둑수업을 통해 쌓은 실력으로 남성바둑의 아성을 호시탐탐 엿보는 차세대 주자이다. 올들어 3승 1패를 기록중인 그는 지난 해 골드뱅크배 특별대국에서 루이 9단을 한 차례 꺾은 경험이 있고, 제4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는 강만우 8단, 김찬우 초단 등을 연파하며 2차예선 준결승까지 진출, 17세 소녀의 국제대회 입성이란 첫 신화를 이룩할 뻔 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선 남성들한테 「하수」취급받고, 국제무대에선 감히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던 우리 여성바둑이 이들 신예 강호의 활약으로 이제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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