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월 스물여덟살의 한 영문학도가 「창작과 비평」이라는 제호의 계간지를 창간했을 때, 그것이 한국의 문학적 학술적 담론의 장에서 그 다음 세기까지 이어질 새롭고 강력한 문화 권력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감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복한 집안과 미끈한 학력에 귀공자풍의 외모까지 갖춘 백낙청이라는 젊은이는 그 뒤 30여 년 동안 이 잡지를 주재하며 한국의 야만적 정권들과 싸웠고, 척박한 문화와 싸웠다.요컨대 그는 한국의 전근대성과 싸웠다. 정권은 거기에 대해 잡지의 판금이나 폐간(1980~1987)으로 답했다. 그동안 홍안의 젊은이는 갑년을 넘긴 노인이 되었지만, 백낙청이라는 이름은, 그가 주재하는 계간지와 출판사를 줄여부르는 「창비」라는 이름과 함께, 한국의 양식을 상징하는 명사가 되었다.
백낙청(62·서울대 교수)씨는 지난 40년 가까이 서울대 영문과에서만 근무했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는 서울대 교수로서보다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으로 더 짙게 각인돼 있다. 아마 후대의 사람들도 그를 「창작과 비평」과 연결지어서 기억할 것이다. 아니 「창작과 비평」을 백낙청이라는 이름과 연결지어서 생각할 것이다.
『「창비」의 백낙청』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것 만큼이나 『백낙청의 「창비」』라는 말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이라는 말이 직설이라면,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은 은유다. 「인물과 사상」이 그야말로 강준만씨의 일인잡지인데 견주어, 「창작과 비평」은 지난 30여년 동안 백낙청씨와 뜻을 함께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 작품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창비 식구」들은 한국 사회의 지성과 양심을 대변해 왔다.
「창작과 비평」은 그 제호가 가리키듯 우선 문예지다. 신경림, 고은, 조태일, 김지하, 김남주, 정희성, 이시영, 김정환, 박노해, 백무산 등 20세기 한국의 시문학사가 건너뛸 수 없는 이름들이 「창비」의 지면에 산재해 있다. 이 시인들은 행동하는 시인들이기도 했다. 김지하와 김남주와 박노해는 70년대와 80년대와 90년대를 감옥 속에서 보내며 한국 사회의 야만을 드러내는 상처가 되었다. 그 세 사람이 감옥 속의 정착민이라면 고은과 김정환은 감옥과 사회를 부단히 오가는 유목민이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가 싶으면 어느 틈에 그들은 시정의 술자리에 있었고, 나왔는가 싶으면 어느 틈에 그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시문학에 견주면 「창비」의 산문 문학은 덜 호화롭다. 그러나 이문구의 「관촌 수필」이나 황석영의 두 중편 「객지」와 「한씨 연대기」만으로도 20세기 산문 문학에 대한 「창비」의 기여는 후하게 평가될 것이다. 황석영씨는 80년대 말에 북한을 오간 탓에 90년대 들어 긴 감옥 살이를 했다. 그 전에, 그의 북한 방문기를 89년 겨울호에 실은 당시의 주간 이시영씨도 감옥행을 피할 수 없었다. 7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리영희 교수를 비롯해서 창비 주변의 지식인들에게 감옥 경험은 하나의 신분 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창비」의 문학 이론은 두루뭉술하게 「민족문학론」이라고 불렸다. 백낙청, 구중서, 염무웅, 김종철, 최원식 같은 이들이 때로는 시민적 관점이나 민중적 관점이나 제3세계적 관점을 보태고 덜면서 민족문학론을 가다듬었다. 90년대 들어서 백낙청씨의 관심이 분단체제론으로 쏠린 뒤, 민족문학론의 정교화 작업은 좀 시들해진 듯하다. 백낙청씨의 이론 작업이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으로 요약될 수 있듯이, 「창비」는 문예지일 뿐만 아니라 학술지이기도 하다. 창비의 초창기에 이미 강만길, 박현채 같은 이들이 역사학과 경제학에서 민족적 관점을 강조하는 글들을 기고했고, 복간 뒤에도 「창비」는 한국 자본주의 논쟁, 분단 체제론, 한국 사회계급론의 쟁점, 동아시아 연대의 모색 같은 특집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한 이론적 탐색을 쉬지 않았다. 백낙청씨의 넓은 교유를 반영하듯, 「창비」에는 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흔히 등장한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보리스 카갈리츠키, 와다 하루키, 브루스 커밍스,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창비」는 앞으로도 한국의 진보적 담론들의 중요한 산실일 것이다. 강준만씨가 지적했듯, 이런 진보적 잡지가 극우 성향의 보수 신문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고종석 편집위원aromachi@hk.co.kr
■ 창간사
이상이 메마르고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작가와 비평가가 힘을 모으고 문학인과 여타 지식인들이 지혜를 나누며 대다수 민중의 가장 깊은 염원과 소수 엘리트의 가장 높은 기대에 보답하는 동시에 세계 문학과 한국 문학간의 통로를 이룩하고 동양 역사의 효과적 갱생을 준비하는 작업이 이 땅의 어느 한 구석에서나마 진행되어야 하겠다. 그 출발이야 누가 하든지 막막한 느낌이 앞서기 쉬울 것이다. 먼 길을 어찌 다 가며 도중의 괴로움을 나눠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직 뜻있는 이를 불러모으고 새로운 재능을 찾음으로써 견딜 수 있을 것이요, 견디는 가운데 기약된 땅에 다가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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