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지하공동구 화재 발생 3일째인 20일 사고현장에서는 증권 금융 정당 등 주요시설의 통신망에 대한 응급 복구작업이 밤늦게까지 계속된 가운데 이 일대 아파트단지와 상가 주민들은 사흘째 통신두절로 고통을 겪었다.◆금융기관 통신망 응급복구는 했지만…
한국통신측은 이날 『밤샘작업을 해서라도 21일 금융시장 정상운용에는 이상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전산망 자체가 사소한 장애에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다 복구작업이 지연될 경우 예정대로 정상거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한국통신에 따르면 이번 화재로 손상된 3만3,141회선 중 국회 금융기관 정당 등 주요시설 통신망은 20일 밤늦게 모두 응급복구됐다. 그러나 아파트단지와 상가 등 일반회선(2만4,192회선)에 대한 복구작업은 21일 오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여의도 일대 금융기관은 이날 통신망 복구작업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월요근무 차질에 대비한 비상근무체계를 마련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동부증권은 사고 발생 직후 전산망이 완전 마비되자 지방직원 등 400여명으로 대책반을 구성, 비상근무를 하고 있다. 이 회사 사이버마케팅 조병오(趙炳五) 부장은 『장중에 이런 사고가 있었다면 외국인에게 톡톡하게 망신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직원은 『한국통신이 약속을 했지만 믿을 수가 없다.아무 대책없이 그냥 기다릴 뿐』이라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사고로 19일 오전5시30분까지 국제선물거래 업무에 상당한 차질을 빚은 LG선물은 20일 직원 15명이 출근, 비상대기했다. 이 회사 사이버영업팀 유동수(柳東秀·33)과장은 『사고 직후 매도·매수 주문이 안돼 휴대폰으로 거래하는 불편을 겪었다』며 『평소 거래량의 40%를 차지하는 인터넷 거래도 먹통이 돼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LG선물측은 『통신망이 정상화하지 않으면 사이버거래는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은 사흘째 고통 불가피
여의도 아파트 밀집지역 주민들도 사흘째 통신두절의 고통을 겪었다. 여의도동 광장아파트 주민 유 송(26)씨는 『업무상 E-메일을 자주 보내야 하는데 전화가 안돼 차를 몰고 인근 PC방에 가서 일을 봤다』고 불평했다. 같은 아파트의 이모(37·여)씨는 『한국통신에서 휴대폰 사용료를 할인해주는 등 피해보상책이 있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여의도역 인근은 사흘째 신호등과 가로등이 작동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주민 김모(35·여)씨는 『오늘(20일)이 아이 돌잔치인데 휴대폰 번호를 모르는 친지에게는 연락을 못했다』고 말했다. 또 화재로 인한 유독가스가 집안으로 날아들어와 대청소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원수기자 nobleliar@kr.co.kr.
■"배전선로 합선"추정
경찰은 20일 여의도 지하공동구 화재사고와 관련,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한국통신 한국전력 등 관계자로 구성된 합동사고조사반을 현장에 3차례 투입해 정밀감식 작업을 벌이는 등 본격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백조아파트 A동 앞 통풍구 밑 공동구에서 발화됐으며, 전력구내 배전선로에서 합선으로 추정되는 불꽃이 생겨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한편 서울시는 이날 여의도 지하공동구 화재사고와 관련, 김학재(金學載)행정2부시장을 반장으로, 외부전문가 및 시설책임자 등으로 합동점검반을 구성해 21일부터 사고가 난 여의도 공동구를 비롯 목동·개포동 등 서울시내 5개 지하공동구에 대한 안전점검을 실시키로 했다. 이주훈기자 june@hk.co.kr
■이원화 관리구조 공동화한 방재
온통 시커멓게 타버린 전선, 엿가락 처럼 휘인 철근, 후끈한 열기와 매캐한 냄새…. 20일 오전에야 사고조사반들이 들어가 본격 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서울 여의도 지하공동구 화재현장은 「면피성 재발방지 약속, 안전불감증, 책임 떠넘기기」등 대형사고 때마다 되풀이되는 관계기관의 구태(舊態)를 웅변하고 있었다.
여의도 지하공동구 화재사고는 1994년 서울 동대문 지하통신구 화재 사건과 한치도 다름이 없었다. 지하공동구에 발생한 작은 불을 17시간 동안이나 잡지못해 금융중심가에 「신경마비」를 가져왔다는 점은 앞으로 유사사고 발생시 엄청난 국가적 혼란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번 사고를 통해 현대국가의 기간시설이 책임관리기관도 모호하고 기본적인 방재시설마저 갖춰져 있지 않은 「지하의 시한폭탄」임이 드러났다. 한국화재보험협회 김동일(48)위험관리정보센터 부장은 『1996년 서울시와 관계기관이 합동으로 실시한 종합안전진단 당시, 이미 시설 노후화로 인한 누전 위험이 지적됐으나 이후 별다른 시정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공무원들의 무지와 무책임을 개탄했다.
지하공동구 방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울시시설관리공단(구조물)과 한전 한국통신 등 각 시설주(시설물)로 이원화한 관리구조. 평소에는 어떻게든 제 밥그릇을 늘리려 다투던 기관끼리 막상 책임질 일이 생기면 서로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고질적인 악습이 이번에도 재연됐다.
게다가 1978년 맨처음 건설된 여의도 지하공동구는 법적으로 방재설비 설치 의무까지 없어 화재에 무방비로 방치돼왔다. 특히 증권·금융기관들과 방송사 등이 집중돼 있는 여의도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관계당국의 무대책이 얼마나 한심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화재로 KBS위성 1·2방송의 송출이 오후 11시10분부터 2시간20분동안 중단된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동대문 통신구 화재사고로 95년 5월 이후 건설된 지하공동구는 연소방지 설비를 갖추도록 소방법을 개정했으나 여의도 지하공동구는 법 개정 이전에 건설됐다』고 말했다. 그 흔한 스프링클러 한대 없었던 것도 이 때문. 경원전문대 박형주(소방안전학)교수는 『전선케이블이 엉켜있고 먼지가 가득 들어찬 지하공동구에는 작은 불꽃에도 불길이 일어나기 쉬워 어느 곳보다 화재에 취약하다』며 『고작 수동소화기 7대가 방재설비의 전부였다니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전기·통신 케이블 외피가 가연성 소재로 이뤄져 있던 것도 화재를 키운 원인이었다. 서울시립대 지진방재연구센터 윤명오소장은 『지하시설물 화재 때마다 끊임없이 지적됐던 것이 각종 케이블의 피복을 단연·불연재로 교체하는 것』이며 『폴리에틸렌 등 가연성 소재로 만들어진 케이블의 경우 화재에 취약할 뿐 아니라 유독가스까지 내뿜어 진화작업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현대방재연구소 김병효소장도 『유리가루나 석면을 입힌 난연성 소재나 실리콘 등 불연재로 피복을 교체해야 하고 배선마다 콘크리트를 입히거나 공동구 중간 중간에 방화벽, 방화문으로 구획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하시설물 화재에 대한 소방당국의 대책도 미흡하다. 서울소방방재본부 관계자는 『지하시설물 화재 진압훈련은 1년에 두번 하고 있으나 전문장비가 없어 형식에 그치고 있다』며 『몸 하나 움직이기도 힘든 공간에서 20분짜리 휴대용 산소호흡기만 갖고는 화재진압을 엄두도 낼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지하공동구는 무엇인가
지하공동구는 각종 전력선과 전화선, 유선방송 케이블, 초고속 광통신망, 상수도관, 난방용 온수관 등 각종 생활관련 중요공급시설을 한꺼번에 모아 설치한 대형 지하구조물이다. 현재 서울시내에는 여의도를 비롯, 목동·개포·가락·상계 등 5개 지역에 총연장 31㎞의 지하공동구가 있다.
78년 만들어진 여의도 지하공동구는 지하 1.5㎙ 깊이에 가로 5㎙, 세로 2.5㎙크기의 콘크리트 터널로, 통신과 전력선을 구분하기 위해 터널 가운데 칸막이벽이 있다. 길이 6㎞에 지하평면적이 3만5,510㎡이며 출입통로인 작업구가 20여 곳에 개설돼 있다. 터널속에는 15만4,000V짜리 배전선로를 비롯, 3만3,000여 전화회선과 47조의 광케이블이 터널 양쪽 위벽면에 부착돼 있으며 바닥에는 수도·난방관이 지나가고 가운데 공간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다.
지하공동구의 콘크리트 박스구조물 관리는 서울시 책임하에 시설관리공단이 맡고있으며 내부 각종 선로는 한국통신과 한국전력, 상수도공사, 지역난방공사 등 해당기관별로 나눠 관리한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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