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시커멓게 타버린 전선, 엿가락 처럼 휘인 철근, 후끈한 열기와 매캐한 냄새…. 20일 오전에야 사고조사반들이 들어가 본격 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서울 여의도 지하공동구 화재현장은 「면피성 재발방지 약속, 안전불감증, 책임 떠넘기기」등 대형사고 때마다 되풀이되는 관계기관의 구태(舊態)를 웅변하고 있었다.여의도 지하공동구 화재사고는 1994년 서울 동대문 지하통신구 화재 사건과 한치도 다름이 없었다. 지하공동구에 발생한 작은 불을 17시간 동안이나 잡지못해 금융중심가에 「신경마비」를 가져왔다는 점은 앞으로 유사사고 발생시 엄청난 국가적 혼란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번 사고를 통해 현대국가의 기간시설이 책임관리기관도 모호하고 기본적인 방재시설마저 갖춰져 있지 않은 「지하의 시한폭탄」임이 드러났다. 한국화재보험협회 김동일(48)위험관리정보센터 부장은 『1996년 서울시와 관계기관이 합동으로 실시한 종합안전진단 당시, 이미 시설 노후화로 인한 누전 위험이 지적됐으나 이후 별다른 시정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공무원들의 무지와 무책임을 개탄했다.
지하공동구 방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울시시설관리공단(구조물)과 한전 한국통신 등 각 시설주(시설물)로 이원화한 관리구조. 평소에는 어떻게든 제 밥그릇을 늘리려 다투던 기관끼리 막상 책임질 일이 생기면 서로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고질적인 악습이 이번에도 재연됐다.
게다가 1978년 맨처음 건설된 여의도 지하공동구는 법적으로 방재설비 설치 의무까지 없어 화재에 무방비로 방치돼왔다. 특히 증권·금융기관들과 방송사 등이 집중돼 있는 여의도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관계당국의 무대책이 얼마나 한심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화재로 KBS위성 1·2방송의 송출이 오후 11시10분부터 2시간20분동안 중단된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동대문 통신구 화재사고로 95년 5월 이후 건설된 지하공동구는 연소방지 설비를 갖추도록 소방법을 개정했으나 여의도 지하공동구는 법 개정 이전에 건설됐다』고 말했다. 그 흔한 스프링클러 한대 없었던 것도 이 때문. 경원전문대 박형주(소방안전학)교수는 『전선케이블이 엉켜있고 먼지가 가득 들어찬 지하공동구에는 작은 불꽃에도 불길이 일어나기 쉬워 어느 곳보다 화재에 취약하다』며 『고작 수동소화기 7대가 방재설비의 전부였다니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전기·통신 케이블 외피가 가연성 소재로 이뤄져 있던 것도 화재를 키운 원인이었다. 서울시립대 지진방재연구센터 윤명오소장은 『지하시설물 화재 때마다 끊임없이 지적됐던 것이 각종 케이블의 피복을 단연·불연재로 교체하는 것』이며 『폴리에틸렌 등 가연성 소재로 만들어진 케이블의 경우 화재에 취약할 뿐 아니라 유독가스까지 내뿜어 진화작업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현대방재연구소 김병효소장도 『유리가루나 석면을 입힌 난연성 소재나 실리콘 등 불연재로 피복을 교체해야 하고 배선마다 콘크리트를 입히거나 공동구 중간 중간에 방화벽, 방화문으로 구획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하시설물 화재에 대한 소방당국의 대책도 미흡하다. 서울소방방재본부 관계자는 『지하시설물 화재 진압훈련은 1년에 두번 하고 있으나 전문장비가 없어 형식에 그치고 있다』며 『몸 하나 움직이기도 힘든 공간에서 20분짜리 휴대용 산소호흡기만 갖고는 화재진압을 엄두도 낼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지하공동구는 무엇인가
지하공동구는 각종 전력선과 전화선, 유선방송 케이블, 초고속 광통신망, 상수도관, 난방용 온수관 등 각종 생활관련 중요공급시설을 한꺼번에 모아 설치한 대형 지하구조물이다. 현재 서울시내에는 여의도를 비롯, 목동·개포·가락·상계 등 5개 지역에 총연장 31㎞의 지하공동구가 있다.
78년 만들어진 여의도 지하공동구는 지하 1.5㎙ 깊이에 가로 5㎙, 세로 2.5㎙크기의 콘크리트 터널로, 통신과 전력선을 구분하기 위해 터널 가운데 칸막이벽이 있다. 길이 6㎞에 지하평면적이 3만5,510㎡이며 출입통로인 작업구가 20여 곳에 개설돼 있다. 터널속에는 15만4,000V짜리 배전선로를 비롯, 3만3,000여 전화회선과 47조의 광케이블이 터널 양쪽 위벽면에 부착돼 있으며 바닥에는 수도·난방관이 지나가고 가운데 공간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다.
지하공동구의 콘크리트 박스구조물 관리는 서울시 책임하에 시설관리공단이 맡고있으며 내부 각종 선로는 한국통신과 한국전력, 상수도공사, 지역난방공사 등 해당기관별로 나눠 관리한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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