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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의 한 순간] 김천영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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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의 한 순간] 김천영 '냉장고'

입력
2000.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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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영 「냉장고」 작은 방이 있었다. 책상 하나와 앉은뱅이 탁자 하나만으로도 꽉 차는, 아주 조그만 방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냉장고가 있었다. 처음에 그 냉장고는 작은 방을 더욱 비좁게 만드는,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나는 냉장고와 앉은뱅이 탁자 사이로 난 협곡에서 위태로운 잠을 청했다. 냉장고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책상을 삼키고, 벽에 걸린 거울을 삼키고, 형광등을 삼키고… 냉장고는 넘실넘실, 작은 방을 온통 채워버렸다. 나도 냉장고 속에 갇혀버렸다. 공포였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다른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 했다. 가전제품인, 불필요한 음식으로 가득 찬, 그리고 차가운… 냉장고에게 온기를 주기로 했다. 체온이 흐르고 더운 피가 돌게 하기 위해 냉장고의 뱃속 깊이 자궁을 하나 심어주었다. 그러자, 더 이상 냉장고가 두렵지 않았다.인생은 공포 아니면 불행이라고, 불행해서 다행이라고, 우디 앨런은 말했다. 불행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가 나는 부럽다. 나에게 인생은 공포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분명한 것을 믿을 수 없다. 지금, 저 유리벽 너머로 힙합바지를 입고 MP3로 음악을 들으며 가는 저 소녀. 그것만으로 저 소녀가 N세대라고 할 수 있나? 강간범은 강간범처럼 생겼고, 바람 피우는 어머니는 딱 바람 피우게 생겼다면… 보이는 그대로 구획정리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힙합바지를 입은 N세대. 그것은 이미지이며 고정관념일 뿐이다. 나는 그 이미지를 볼 수는 있지만 실체를 잡을 수는 없다. 내 앞을 가로막는 투명한 유리벽 때문에. 유리벽을 깨고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그것은 흉측하게 변해버리거나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릴지도 모른다. 더 무서운 건, 유리벽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다고 여겨온 모든 것들의 밑에 깊은 수렁처럼 놓인 알 수 없는 그것, 깜빡 발을 잘못 짚으면 가차없이 나를 끌고 들어갈 삶의 허방…. 나에게 인생은 공포다. 그러나, 소설을 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소설가·명지대 문창과 졸업·1997년 「문학동네」 하계문예공모 당선·소설집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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