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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 기행] (7) '오색무지개' 만년교를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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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 기행] (7) '오색무지개' 만년교를 건너다

입력
2000.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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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일행은 9월 19일 웨이현을 떠나 다음날 칭저우(靑州)에 닿았다. 칭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구주(九州)의 한 고을로 일컬어지고, 당나라 때는 산둥의 지방장관인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가 주재했다. 산둥 중부지방의 요지로서 명나라 때는 칭저우부, 지금은 이웃의 웨이팡시에 속하고 인구는 85만명이다. 오랜 역사 도시라 많은 문화재와 역사 유적이 있다.9월 21일 아침 홍익한 일행은 칭저우 북문을 나와 난양허(南陽河)의 만년교(萬年橋)를 건넜다. 『다리 높이는 100여 자(尺), 마치 오색 무지개가 하늘에 떠 있는 것 같다』고 감탄했다.

만년교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 명교(名橋)의 하나로 지금도 교통의 요충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송나라 때(1032∼1033) 중국 최초의 교각이 없는 아치형 나무다리로 세워진 후 명나라 때(1414년)에 6돈(墩, 교각 여섯 개) 7홍(虹, 아치 일곱 개)의 돌다리로 다시 세워졌다. 송나라 때의 명화 「청명하상도(淸明河上圖)의 반달형 굽은 다리처럼 아름다워 당시 서화의 대가 미불(米불)이 비문을 지어 찬양했다고 한다.

교각에는 용머리에 갈퀴가 긴 상상의 물짐승을 새기고 난간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 24명을 기린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 소나무·두루미의 길상도(吉祥圖), 장량이 다리 밑에서 황공의 신발을 주웠다는 「장량이하우황공(張良이下遇黃公)」의 고사도(故事圖) 등을 부각했다. (장량은 한고조 유방의 공신 중 한 명으로 젊은 시절 불우하게 지내다가 우연히 다리 위에서 만난 황공이란 노인의 신발을 주워주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 큰 인물이 됐다고 한다)

난간 기둥머리에는 「보병(寶甁)」 18쌍, 사자 19쌍을 새겨 다리가 아니라 무슨 설치미술품 같은 느낌이다. 문화혁명 때 파괴·손상된 것을 1986년 고풍은 덜하지만 원형대로 복원했다. 다리 길이 86㎙, 너비 9.4㎙, 높이 9㎙로 지금은 자동차·마차·행인으로 붐비는 칭저우시 굴지의 간선교량이다. 세워진 지 천년, 돌다리가 된 지 근 600년의 다리가 지금도 쉴 새 없이 활동하고 있다. 다리 양쪽 끝에는 온갖 잡상인이 들끓고 그중 노천 이발소, 거리 푸줏간이 제법 이색적이다. 가위 든 이발사는 한 손님을 보내고, 서성대는 필자 보고 앉으라고 손짓한다. 만년교에서 「기념이발」도 괜찮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다리에서 파토스를 느낀다. 다리 몸체의 공학적인 멋스러움,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사연, 삶과 아랑곳없이 무심히 흐르는 강물… 다리의 미학은 자연 풍경과 심상(心象) 풍경이 어우러져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은 다리를 노래했다. 중국 과학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영국의 니담은 중국의 다리를 일컬어 「이성과 낭만주의의 멋진 결합」이라 했다.

다리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이번 그림 「칭저우부도(靑州府圖)」의 주제가 만년교이기 때문이다. 그림 한가운데 만년교를 큼지막하게 들어 앉히고 우측에 칭저우 성곽을 비교적 크게 그려 두 인공 구조물을 연계시킴으로써 계화(界畵: 자를 갖고 제도하듯 그린 그림)의 효과를 뚜렷하게 연출한 것이다. 계화의 미학은 직선과 곡선의 다이나믹한 기하학적 만남이다.

만년교의 7홍을 5홍으로 실물보다 줄이고 안에는 잔 붓질로 물결 무늬를 그려 넣어 잔잔한 강물을 묘사했다. 난간과 난간주를 크고 정확하게 그렸고 난간주 머리의 보병 묘사는 실물을 방불케 할 만큼 정교하다. 다리 위 행인을 군중으로 묘사하지 않고 서너 사람을 점경(點景)으로 곁들인 것은 화법(畵法) 기교의 번거로움보다도 다리 자체를 클로즈업시키려는 화가의 시각인 듯 하다. 서너 사람 행인 중에 한 사람이 외바퀴수레를 밀고 간다. 성문은 칭저우의 북문 첨진문(瞻辰門)일 것이다.

맹상군고리(孟嘗君故里)는 식객 3,000명을 거느렸다는 중국 전국시대의 제나라 영웅 맹상군의 옛집터를 그린 것이다. 현실의 실경 속에 심상(心像)의 실경을 접목했다. 뒷날 이곳에 용흥사(龍興寺)가 들어섰다. 근년의 발굴조사로 많은 값진 불상이 출토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나무의 묘사는 서양화의 원근법처럼 앞의 것은 크게, 뒤의 것은 작게 해 화법이 매우 이색적이다. 나무에는 분홍색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어 무슨 과일나무 같다. 음력 9월이라 이곳 칭저우의 과일로는 복숭아나 감이 특산인데 나무 크기나 모양새로 감나무로 보인다. 만년교를 지나면 위쪽에 높이가 각각 다른 기와집 세 채가 있는데, 뒤채만 우뚝해 법당 같기도 하고 옆에 탑이 있어서 아마도 미타사(彌陀寺)인 듯하다.

송나라 때 옛절로 홍익한 일행은 이곳에 들러 다과(茶果)의 환대를 받고 부채에 시 6수를 적어 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때의 시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그림 위쪽에 여러 산봉우리들을 그렸는데 가장 크고 돋보이는 산이 타이산(岱岳)과 윈먼산(雲門山)이다. 먼 곳의 타이산은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지만 윈먼산은 실경이다. 윈먼산은 칭저우의 진산(鎭山). 시내에서 남쪽으로 2.5㎞, 높이 421㎙, 5개의 석굴과 마애불상 272존(尊)이 있는데 공양기(供養記)를 보면 수·당 시대의 것도 있다. 산마루는 대운정(大雲頂)이라는 돌산인데, 이곳에 큰 굴을 뚫어 앞뒤가 환히 내다보인다. 그림의 원먼산을 보면 가운데가 환하게 뚫려 있어 실경 그대로 그린 것이다. 한가지 실경과 맞지 않는 것은 태산과 원먼산이 남쪽에 있어야 하는데 위쪽(북쪽)에 자리잡은 점이다. 두산을 강조하기 위해 위쪽으로 옮겨 그린 것으로 풀이된다.

칭저우부도는 절파풍(浙派風)을 가미한 조선조 중기 실경 산수화의 좋은 한 폭이다. 그림 왼쪽을 보면 뉴산(牛山), 위에 제경공묘(齊景公墓: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경공의 묘)가 있다. 칭저우부의 속현인 린치현(臨淄縣, 지금은 치뻐시 린치취·淄博市 臨淄區)은 옛날 제나라의 도읍 터로 많은 제나라 능묘(陵墓)가 남아 있다. 린치취의 신띠엔(辛店)에는 강태공묘(姜太公墓), 치두(齊都)에는 안영묘(晏 墓), 삼사묘(三士墓), 치링(齊陵)에는 이왕총(二王 : 제나라 환공과 경공의 무덤), 사왕총(四王 ), 관중묘(管仲墓) 등이 있다. 홍익한은 뉴산 등에 올라 산 아래 누워 있는 제왕(齊王)·제사(齊士)들의 크고 작은 무덤을 굽어보면서 역사의 심상 풍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뉴산 주위는 모두가 마을이다. 가을 바람은 소슬하고 고적은 황량하며 검푸른 바위는 깎아 세운 계단과 같다. 여기가 제 경공이 눈물 흘린 곳인가? 이 산의 북쪽 기슭에 관중묘가 있고 묘 앞에는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그 동쪽에는 투터우산( 頭山)이 있으며 제 환공, 제 선황, 제 경공, 제 양왕 전단(田單)의 묘소는 비석이 있기 때문에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퀘이치우(葵丘)에 들렀다. 환공은 이곳에서 패업(覇 業)을 이룩하고 양공은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같은 곳에서 이렇게 운명이 다를 수가 있는가! 군주의 어질고 불초함을 알 수 있구나』박태근(관동대 객원교수)명지대·LG연암문고 협찬

■연행도

관동대 박태근 객원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씨가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사고에서 찾아낸 조선중기 기록화 「연행도폭」(燕行圖幅)은 1624년 조선 인조의 왕권을 승인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홍익한( 洪翼漢) 일행의 행적을 담은 국내 유일의 바닷길 연행 화첩입니다. 낙장이나 파본 하나 없는 25장의 그림은 평북 곽산군의 선사포(宣沙浦) 항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조선 중기 회화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

■[연행도 기행] 임진왜란때 명군총수로 참전

2000/02/20(일) 22:08

칭저우의 역사에서 우리와 관계되는 인물이 두 사람 있다. 첫째는 당나라 때의 이정기(李正己. 732~781), 원래 고구려 사람이다.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후희일(候希逸)의 부하로서 762년 영주(營州.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있다가 군사 2만명을 이끌고 버하이를 건너 이곳 칭저우로 이동했다. 765년 상관인 후희일을 몰아내고 대신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가 되어 칭저우, 덩저우, 쉬저우(徐州) 등 15주(지금의 산둥성 일대와 장수성 북부)를 지배하는 광역(廣域) 대군벌로 성장했다.

이정기, 이납(李納), 이사고(李師古), 아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쳐, 765년에서 819년까지 54년간, 당 왕조의 명령을 받지않는 사실상의 독립왕국을 형성했다.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스스로 제왕(齊王)이라 일컫기도 했다. 고구려인 후예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동한 사람은 고선지 장군과 이정기이다. 이정기 일가는 단순한 지방군벌이 아니라 선정을 베풀어 후세 사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랑스러운 고구려인다.

다음은 명나라 때 형개(邢개. 1540-1612)이다. 그는 임진왜란 후 일본군이 다시 침략한 1597년 명나라 군대의 총수(병부상서 겸 계료총독)로서 항왜전쟁(抗倭戰爭)에 참전해 조선을 도와 일본군을 물리치고 1599년 귀국했다. 조선사람으로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칭저우 출신이다. 칭저우 박물관 관장 샤밍차이(夏名采)씨의 도움으로 그의 집터를 찾았다. 판궁팅시루(范公亭西路) 한가운데 있는 칭저우시 재정국 옆의 북쪽으로 난 너비 3.4㎙ 길이 5.6㎙의 작은 골목이 바로 형개가 살던 형개항(邢개巷)이다.

지명 표시판에 뚜렷이세 글자가 쓰여있다. 칭저우 땅 위에 남아있는 형개의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홍익한은 형개댁을 찾으려 했으나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고 이민성, 김상헌은 현지에서 형개를 추모하는 시를 썼다. 당시 조선인들이 그랬듯이 조선 사절들도 형개의 참전을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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