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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입력
200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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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었나요?』. 몇 년째 병원을 다니고 있는 50대 여성 환자의 최근 검사결과가 약간 나쁘게 나와 물어보았다. 그런데 『별 일이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별 일이 없는데 왜 검사결과가 나빠진 것일까. 이유를 알기 위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해봤지만 속 시원히 잡히는 게 없었다. 『혹시 애 보신 것 아니에요?』. 아니나 다를까, 『예, 큰 애가 손주를 낳아서 산후조리를 해주고 있어요』라고 했다.우리나라 50대 여성은 참 불행한 세대이다. 위로는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줄줄이 모시고 살다가 고생고생 끝에 애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를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끝이 아니다. 유행같은 맞벌이 때문에 시집간 딸이나 며느리의 산후조리는 기본이고, 실질적인 육아까지 떠맡는 경우가 많다. 손주 귀여운 것도 한두 번이지, 아예 결혼해서 애 낳으면 친정이나 시어머니에게 맡기기로 작정하고 있는 요즘 젊은 사람들의 세태를 보면 정말로 이건 장난이 아니다.

말이 좋아서 애를 보는 것이지, 요즘 애들 기르기가 옛날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까다롭기가 이를 데 없으니 이런 일이야 잘 해야 본전이 아닌가. 『아니 그렇게 힘들면 애를 못 봐준다고 하지 그러느냐』고 하면 『결혼해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느냐』는 참으로 딱한 대답이다.

50대는 의학적으로 암, 고혈압과 같은 각종 성인병이 가장 잘 생기는 나이다. 더욱이 여성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폐경이 된다. 폐경기를 전후해 신체적 능력은 빠른 속도로 약화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불안해진다.

50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쉬면서 자신의 건강을 돌봐야 할 나이인데 현실적으론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저런 질병에 시달리는 많은 50대 여성들이 손주의 뒤치다꺼리로 제 때 병원에 못 가고 과로로 인해 병세가 나빠지는 일이 오늘도 진료실에선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다고 자녀들로부터 정당한 보상을 받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형규·고대안암병원 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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