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근대 올림픽의 주도적 창건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만든 이 구호는 지난 일백여년 동안 몸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몸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쏟아온 노력의 간결한 지침이 되었다. 이 구호는 새 천년을 맞은 올여름 시드니에서 열릴 제27회 올림픽 경기에서도 엄숙하게 울려 퍼질 것이다.「더 빨리!」는 아마추어 스포츠에만 유효한 구호가 아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올림픽 못지 않게 강한 매력으로 대중을 열광시키며 올림픽 자체를 탈아마추어화해 온 프로 스포츠들도 이 「더 빨리!」의 철학, 곧 기록 경신의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 곧 지혜로운 인간으로서의 인류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호모 파베르이기도 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호모 로 스이기도 하며,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이기도 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또 하나의 특질을 보탰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필립 시모노에 따르면 현대의 인간은 호모 스포르티부스, 곧 스포츠 하는 인간이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이징하가 명명한 호모 루덴스, 곧 놀이하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늘 있어왔던 인간의 모습이라면, 그것의 특정한 형태로서의 호모 스포르티부스는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이 확장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은 앞으로도 꽤 오래도록 호모 스포르티부스로 남을 것 같다.
시모노의 책 「호모 스포르티부스」(1988)는 근대 올림픽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핀다.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부활시킨 1896년은 노동자 계급의 물질적·정신적 빈곤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이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있을 때다. 물론 쿠베르탱이 그것을 의식해서 올림픽을 부활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스포츠는 프롤레타리아의 욕구불만을 잠재워서 이 위기의 자본주의를 도와주는 데 필요한 세 가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스포츠는 프롤레타리아를 술에서 떼어놓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었다. 둘째, 스포츠는 사회 질서를 흩뜨리지 않으면서 인간의 파괴 욕망을 발산하게 할 수 있었다. 셋째, 스포츠는 평화와 공정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없애고자 했던 자본가들은 스포츠에 대한 스폰서링에서 이상적인 판촉의 수단을 발견했다. 어떤 운동 선수가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을 때, 그의 스폰서 노릇을 하는 자본가의 돈은 사람들의 눈에 비교적 깨끗하고 정당해 보이는 것이다. 기업의 내부에서도 스포츠는 피고용자들이 자신들의 일에 더 열정을 쏟을 수 있게 만드는 「정신의 덤」 구실을 했다. 예컨대 르노 공장의 노동조합은 회사에 커다란 재정적 부담이 되는 자동차 레이스 경주 「포뮬러 1」의 지원 사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렇게 해서 스포츠는 현대 경제와 사회의 모든 층위에 파고들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었다면, 시모노가 보기에는 스포츠야말로 인민의 새로운 아편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는 하나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가 미디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거기에 광고가 딸리게 되면서, 아마추어리즘은 사망 선고를 받았다. 국제올림픽 위원회는 1983년까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아마추어리즘을 견지했지만, 올림픽 경기의 방영권과 엠블렘, 로고 따위를 독점함으로써 이미 그 이전부터 거대한 기업이 되었다. 올림픽의 텔레비전 중계권료와 광고 수입은 대회를 치를 때마다 눈덩이처럼 덩치가 커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도합 10억달러를 넘어섰다. 올림픽 위원회는 동계 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둘러싼 뇌물 스캔들로 지난 세기를 마감했다.
프로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화려한 꽃이면서도, 자유 경쟁이라는 그 자본주의의 원리를 무너뜨리는 불공정 거래의 표본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도 비슷하지만, 미국에서 프로 스포츠는 어떤 다른 기업도 갖지 못한 영업상의 특권을 지니고 있다. 연방 독점 금지법은 카르텔을 금지하고 있지만, 프로 스포츠 연맹은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자기들끼리 지역을 나누어 선수의 입단과 계약 조건을 규제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새로운 구단은 기존 구단주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창설될 수 있고, 개별 구단은 구단 연맹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지역을 옮길 수 있다.
스포츠는 경제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현상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는 흔히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의 온상이 된다. 실상 쿠베르탱 자신이 인종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다른 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우월함을 공언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의 정치 선전장이 된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그의 애정은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보다는 「아리안족의 신화」와 더 깊이 관련돼 있었던 셈이다. 쿠베르탱이 죽은 지 두 세대가 지났지만, 올림픽 경기에는 아직도 인종주의의 그늘이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드리워져 있다. 경기 종목과 그 종목들에 배당된 메달 수를 보아도 올림픽은 여전히 부유한 나라들의 행사다. 게다가 자기 나라의 운동 선수들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쏟아붓는 민족주의적 열정들은 전체주의의 토양이 되고 있다. 끔찍스러운 것은 이런 모든 상업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광란들이 올림픽 경기라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종교의 외투 속에 안전하게 몸을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몸의 존재이므로, 스포츠는 앞으로 오래도록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가 지금처럼 실력 위주의 위계 기준과 숙련에 기초한 성공만을 찬미할 때, 오직 기록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서 그릇된 사회 진보관을 제시할 때, 인간의 신체를 능률성과 생산성이라는 기술주의적 준거틀에 맞추어 바라보게 만들 때, 소외된 사람들을 현실에서 도피시키는 보상 메커니즘으로 작용할 때, 상업주의를 숭배하며 국가와의 상징적 연결을 통해서 억압적 국가의 정당성을 재생산해낼 때, 그 때 스포츠는 장-마리 브롬의 책 제목대로 「측정된 시간의 감옥」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 스포츠는 신체적 자유나 창조적 자발성이나 놀이 충동과 완전히 분리됨으로써, 그 자체로서 구속이며 동시에 또다른 구속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포츠와 사회 계급
여가 생활의 형태와 사회 계급 사이의 관계는 사회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왔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평범한 예술」(1965), 「구별 짓기」(1979) 같은 일련의 저작은 서로 다른 계급 구성원들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문화 활동에서 수행하는 차별화 전략에 대한 탐구다.
다른 계급들 사이의 여가 활동의 차이는 스포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정한 스포츠는 특정한 사회 계급이나 계층과 상대적으로 더 긴밀히 연결돼 있다. 상위 계급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한 스포츠를 선호한다. 중하위 계급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또는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특정한 스포츠들을 즐긴다. 미국의 경우에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모터보트와 오토바이 타기다. 반면에 골프나 테니스는 전통적으로 상류 계급이 하는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그레고리 스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 대도시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 조사를 기초로, 스포츠와 사회 계급과의 관계를 따져 보는 일련의 논문을 썼다. 그에 따르면 미국 상류 계급은 보는 스포츠보다는 직접 하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반면, 중간 계급과 하위 계급은 보는 스포츠를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로 꼽고 있다.
중하위 계급이 스스로 하는 스포츠보다 보는 스포츠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은 스포츠에 대한 텔레비전의 영향이 증가한 결과로 분석된다. 또 상류 계급만이 자신들이 구경하는 스포츠보다 직접 하는 스포츠를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로 꼽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다른 계급과 달리 직접 스포츠를 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이 넉넉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하위 계급 사람들은 상위 계급이나 중위 계급보다 직업적으로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여가를 스포츠에 사용하기보다는 힘이 덜 드는 레저활동이나 휴식에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육체노동자들의 경우엔 자유시간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내는 비율이 높은 것이다.
1960년대 말 미국의 스포츠별 블루 칼라 출신 선수들의 비율에 대한 한 조사에 따르면 레슬링이 48.1%로 가장 높았고 그 뒤를 야구, 풋볼, 육상이 이었으며, 조정이 10.4%로 가장 낮았다. 테니스와 수영도 블루 칼라 출신 선수들의 비율이 낮은 스포츠들이다.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특정한 스포츠를 선호하는 데에는 경제적 이유 말고도 문화적 이유가 개입한다. 민첩성이나 품위나 기교보다는 스피드나 힘을 중시하는 종목, 선수와 관중 사이의 일체감을 만들어내는 종목, 또 오토바이 경주와 같이 전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화에서 나온 경기들이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스포츠」를 이룬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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