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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 기행] (6) 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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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 기행] (6) 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

입력
2000.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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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관동대 박태근 객원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씨가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사고에서 찾아낸 조선중기 기록화 「연행도폭」(燕行圖幅)은 1624년 조선 인조의 왕권을 승인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홍익한( 洪翼漢) 일행의 행적을 담은 국내 유일의 바닷길 연행 화첩입니다. 낙장이나 파본 하나 없는 25장의 그림은 평북 곽산군의 선사포(宣沙浦) 항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조선 중기 회화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

이민성은 전에 없이 전쟁 경기에 들떠 있는 덩저우(登州)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람한 성곽 안에는 인가가 꽉 차 있다. 빽빽하게 들어선 가게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온 저자에 술냄새 차(茶) 내음이 코를 찌른다. 앞뒤에 치솟은 대갓집과 정문(旌門)들, 그 번화함을 베이징(北京) 지방과 비교하면 융핑(永平)부와 맞먹는다. 여염집의 아낙네들조차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것은 랴오둥(遼東) 지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치루(齊魯, 산둥지방을 말함) 지방의 미풍양속을 알 수 있다』

덩저우의 시장경제의 열기 속에서 조선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무역(私貿易)용의 화물을 휴대한 통역과 군관들은 공무는 아랑곳없이 온 종일 시장만 쏘다닌다. 번번이 곤장을 치기도 어렵고 꾸지람하기도 뭣하니 참으로 인간 별종들』이라고 조즙은 개탄했다. 드디어 조즙 사행 중에서 상통사(上通事·고위 통역관) 조안의(趙安義)가 은을 도둑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랴오둥 건달들이 사절단의 아랫것들과 짜고 훔쳐간 것이다.

한편 이런 와중에서도 향신(鄕紳, 지방 명사)인 진몽침(陳夢琛)이 후원자가되어 현직 고위관료 전일정(田一井), 전 관료 류국진(劉國縉), 난민 문인 오청천(吳晴川) 등을 모아 문화살롱을 만든 것을 보면 중국 문화의 중층구조를 가히 알 수 있다.

이덕형, 홍익한 사행은 1624년 9월 12일 덩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까지 1,700리.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濟南)까지의 900리 길은 예로부터 산둥의 「동서대로」라 하여 중국과 신라(고려), 발해,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와의 중요 국제교통로였다. 한편 신라 스님들의 구도의 길이기도 했다. 실크로드이자 「수트라 로드」(불경의 길)인 셈이다. 연도 사찰에는 신라 스님을 접대하기 위해 「신라원(新羅院)」이 세워졌다. 당나라 때 839년 신라 스님 양현(凉賢)은 덩저우 원등현의 신라 법화원에서 이 길로 불교성지 오대산까지 장장 2,990리 길을 걸었고 다음해 일본 스님 엔닝(圓仁)도 같은 길로 오대산에 갔다. 당나라 때 신라인이 간 길을 홍익한이 갔고 홍익한이 간 길을 필자는 간다. 길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길이나 단지 다듬고 넓히고 포장했을 뿐이다.

이덕형, 홍익한 사행은 15일 라이저우(萊州), 18일 웨이허(유河)를 지나 웨이현(유縣·지금의 웨이팡시)에 닿았다. 그들은 웨이허를 건너면서 웨이허 상류에서 일어난 초한(楚漢)전쟁을 기록한 「사기」(史記)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산둥성 주청(諸城)현 북쪽 26㎞의 구셴춘(古縣村) 마을. 동쪽에 있는 해발 200㎙ 가량의 작은 협곡 때문에 웨이허는 수로가 좁아져 병목현상으로 갑자기 급류로 변한다. B.C. 204년, 한(漢)나라 장수 한신(韓信)이 협곡 상류에 모래 주머니(낭사·囊沙)로 물막이를 한 후 초 나라 장수 용저(龍且)의 20만 대군을 유인했다. 수심이 얕은지라 초군이 도하 도중, 한신은 모래 주머니를 철거해, 갑자기 불어난 급류로 초군을 익사시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역사적인 전적지에 지금은 1973년에 세운 「구셴수력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그림의 「낭사상류(囊沙上流)」는 바로 한신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1625년 조선 사절 전식(全湜)은 웨이허를 지나면서 역사와 시사(時事)를 엮은 멋진 영사시(詠史詩·역사를 읊은 시) 한 수를 남겼다. 『그 옛날 한 장사가 분연히 일어나 / 제 나라를 쳐부수고 한 나라 공신이 되었다네 / 지금 요해(遼海)는 캄캄한 풍진 세상(누루하치의 청나라를 말함)/ 모래사장 바라보며 하염없이 옛 일을 생각하네』

웨이팡(유坊)시는 4구, 6시, 2현, 인구 830만명. 산둥성 중부지방 굴지의 산업도시이다. 예로부터 농업, 상업의 고장으로 수공업과 제염(製鹽)이 발달해 부유한 곳으로 이름났다. 웨이팡은 해마다 「국제 연 날리기 대회」를 열고 또 국내에 유일한 「연 박물관」이 있어 「연의 도시」로 불린다. 전통적인 민간 판화도 이곳의 특산이다.

웨이팡은 한편 청나라 때의 저명한 예술가 정판교(鄭板橋)의 고장이기도 하다. 정판교는 1746년에서 1752년까지 웨이현의 고을을 살며 좋은 작품활동을 했다. 필자는 정판교가 웨이현에서 만든 작품 중에서 1752년의 「유현중수성황묘비(유縣重修城隍廟碑)」를 보기 위해 웨이팡시 박물관을 찾았다. 1989년 고병익 박사님을 모시고 처음 온 후 11년 만의 나들이다. 시내는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 엄청나게 변모했지만 박물관은 아담하고 단아한 옛 모습 그대로이다. 박물관의 세계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요 정지된 시간이다. 비석은 높이 1.9㎙, 너비 80㎝, 글씨는 반듯한 해서체다. 침침하고 휑한 진열실 한 구석에 비스듬히 서 있다. 이 비석은 글 좋고(文好), 글씨 좋고(書好), 새김새가 좋아(雕好)서 삼절(三絶)로 불린다.

글 내용이 아주 독특하다. 신전(神殿)의 비문은 덕담이 보통인데 정판교는 반대로 신을 부정하는 글을 썼다. 이보다 더한 신성모독이 어디 있을까! 그는 가로되 『귀, 눈, 입, 코, 팔 다리를 갖추고 말하고 옷 입고 예의를 아는 것이 사람인데, 저 푸른 하늘(신을 말함)이 어찌 사람처럼 귀, 눈, 입, 코가 달렸단 말인가…』라고 하여 사람이 신의 형상을 만들고 또 생사화복(生死禍福)의 권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신권인수설(神權人授說)」이다. 우상신(偶像神)을 부정하는 근대적 합리주의 정신이 약여하다. 신을 찬송하는 성전에서 신을 부정하는 정판교의 신격 파괴 메시지를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필자는 박물관에서 뜻하지 않게 250년 전 성황묘가 아직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박물관 앞 골목길을 서쪽으로 가서 큰길을 건너면 바로 웨이청취청황먀오제(城區城隍廟街). 작고 낡은 민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길가에는 먹거리 노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서민들의 삶의 열기가 후끈한 옛날 저자 풍경이 펼쳐진다. 좁은 골목 어귀에서 어떤 아가씨에게 성황묘를 물어보니 골목 안 막다른 집인데, 그게 자기 집이라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웨이팡시 박물관 직원이다. 이 역사적인 정판교 문학의 장소에 지금 왕씨 일가가 살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아찔한 기우(奇遇)이다.

그녀의 호의로 집을 방문했다. 정전과 뒤채, 그리고 동쪽 행랑이 그대로 남아 있어 국보에 버금가는 문화재(산둥성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노후하고 어수선한 폐옥 같은 살림집이지만 넉넉하지 않은 지식인인 아버지와 발랄한 그녀는 무례하게 뛰어든 외국의 길손을 마다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판교 선생님! 부디 왕씨 일가에 큰 복을 내리소서.

박태근

명지대·LG연암문고 협찬

■[연행도 기행] 정판교…예술의 고향 '웨이팡'

정판교(鄭板橋·1693-1765), 본명은 「섭(燮)」, 중국 청나라 때의 위대한 예술가. 장수성 싱화(江蘇省 興化) 출신으로, 시문·글씨·그림 모두 탁월해 중국인들은 우리가 추사 김정희를 받들 듯이 정판교를 떠받든다. 우리나라에도 「정판교 팬」이 적지않다.

중국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홍루몽(紅樓夢)」연구를 「홍학(紅學)」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정판교 연구를 「정학(鄭學)」으로 하자고 할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70여년 동안 그에대해 발표된 논문은 수백 편, 책은 수십 종으로 역대의 예술가 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그는 젊어서 가난해 양저우(揚州)에서 그림을 팔아 살았고 중년에 산둥성의 웨이현 등에서 지현(知縣·현령)으로 벼슬살이를 한 다음 다시 양저우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창작활동을 했다. 당시 정판교를 비롯해 동시대에 양저우에서 활동한 개성적이고 전위적인 작가 그룹을 「양주팔괴(揚州八怪)」라 하여 중국 미술사 한 맥을 이룬다.

정판교의 작품은 투철한 인본주의 사상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웨이현 재임 중에 탁월한 작품을 많이 내놓아 웨이현은 정판교 예술의 성지(聖地)가 되다시피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흉년이 들어 떠돌이가 된 농민의 참상을 읊은 「도황행(逃荒行)」, 가난해서 아내를 팔아버린 농부가 아내를 되사오는 아이러니컬한 애환을 그린 「환가행(還家行)」 등이 있다.

이들 작품의 강렬한 휴머니티와 리얼리티는 시공을 초월해 우리 가슴에 와 닿는다. 「유현신수성황묘기」도 웨이현 시대의 명품이다. 정판교가 웨이현에 온 것은 홍익한보다 120여 년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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