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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사랑운동의 개척자들 곽진영-박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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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사랑운동의 개척자들 곽진영-박진탁

입력
2000.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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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든 죽어서든 자신의 장기로써 생명을 살리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 신체가 갖는 엄청난 가치를 희생하는 것은 거의 맹목적인 이타심이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장기기증이 비도덕적인 행위로 여겨지고 때로는 매매라는 가장 저급한 방식으로 뒤틀려지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장기기증을 우리 사회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잡게 하고 순수한 기증과 투명한 분배라는 정상적인 수급구조로 만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이 지난한 작업을 진두지휘해온 두 사람이 뇌사를 인정하는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의 시행에 즈음해 자리를 같이했다.박진탁(朴鎭卓)

1936년생. 경복고와 한신대를 졸업한 뒤 1963년부터 5년간 우석대병원 원목으로 활동했다. 1968년 한국헌혈협회를 세우고 회장으로 재임하다 1984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1991년 한국으로 돌아와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를 만들고 본부장에 취임했다. 국내 최다 헌혈자 기록(112회)으로 1991년 보건의 날 국민포상을 받았다.

곽진영(郭鎭榮)

1939년생. 경남고와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가 됐다. 1972년부터 한양대 의대 외과교수로 재직하다 1997년 한양대 병원장에 취임했다. 1978년 노르웨이 오슬로대병원 이식센터에 연수를 다녀온 뒤 국내에서 신장이식 분야를 개척했다. 197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하는 기록을 세웠다.

- 두 분은 우리나라에서 장기이식운동을 처음 시작하셨고 지금까지 이 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오셨는데요. 그만큼 인연도 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곽진영= 1990년 한국일보에 박목사님에 대한 기사가 실렸어요. 장기가 매매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한탄하고 순수한 공급자를 발굴, 장기를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연결시켜주는 조직을 만든다는 내용이었어요. 장기이식을 개척한 의사 가운데 한사람으로서 저도 이런 조직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을 하고 바로 만났어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스파크가 튀었어요. 인간과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부터 같더군요.

박진탁= 곽원장님의 도움으로 1991년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를 만들었어요. 목사와 의사가 힘을 합치니 안되는 일이 없더군요. 창립식이 있었던 서울YMCA 앞길이 식장에 못들어온 사람들로 가득했죠. 더 큰 인연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저 자신이 먼저 이선구(43·교직원)씨라는 분에게 신장을 기증했는데 당시 집도의가 곽원장님이셨다는 것이죠.

곽진영= 사실 박목사님과의 인연은 1978년 노르웨이로 연수를 갈 때부터 예비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당시 노르웨이는 이미 뇌사자의 장기이식를 위한 합법적 장치가 있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요. 이듬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한양대 병원에서 뇌사자의 신장을 떼내 환자에게 이식했지요. 뇌사자 이식은 국내에서는 처음이었어요. 언론은 대서특필하고 검찰과 경찰은 수사를 했어요. 그러나 의학발전을 위해서라면 법적 책임을 얼마든지 지겠다고 공언한 뒤 계속해서 5명의 뇌사자 신장이식수술을 했어요. 이후 뇌사의 법적 인정과 건전한 장기기증 풍토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어요. 그러니 박목사님이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박진탁= 곽원장님이 운명론을 이야기하니 제가 장기기증운동을 하게 된 것도 운명적이었음을 말씀드려야 겠군요. 우석대병원 원목 시절에 피만 있으면 수술을 해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헌혈을 시작했어요. 나 혼자만의 헌혈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1968년 한국헌혈협회를 만들었죠. 그러나 이 운동을 15년간 하면서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어요. 1984년 동생들이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했어요. 아내가 시작한 마켓이 성공하고 두 자녀도 하버드를 졸업해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1990년 교포 한사람이 위독하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뇌사라고 말하고 혹시 장기기증을 하겠냐고 묻더군요. 그 분의 가족들과 하루를 상의하다 기증하기로 했어요. 그날로 그 사람의 장기 8개가 미국 전역으로 옮겨져 소중한 생명을 살리더군요. 이 장면을 내가 본 것도, 우리 가족이 미국에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준비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운동을 시작했어요.

- 뇌사를 공식인정하여 9일부터 시행되는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도 두분의 노력 덕분인데요, 법은 제대로 만들어 진 것입니까.

곽진영= 제가 뇌사자 장기이식을 한 이후 다른 병원에서도 시작됐습니다. 1998년의 경우 모두 536건의 뇌사자 장기이식이 이뤄졌으니 굉장한 발전이죠. 그러나 지금까지 이식된 2,000여건은 모두 불법이었습니다. 뇌사를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냥 당국의 묵인 하에 이뤄진 것입니다. 이 법에 따라 국가가 정한 의료기관이 뇌사를 판정하고 가족이 동의하면 수술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보람있고 자랑스럽습니다.

박진탁= 장기기증운동이 이웃사랑실천의 차원에서 제도의 차원으로 발전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점도 적지 않아요. 우선 국가가 설립한 장기이식관리센터가 희망자 등록부터 장기의 분배까지 장기이식 업무 전반을 맡는 것은 문제입니다.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같은 민간단체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위축시키게 되고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질 가능성도 많아요. 제가 벌였던 헌혈운동이나 골수기증운동도 국가가 주도하면서부터 예산도 늘지 않고 그나마 제대로 집행이 안됩니다. 이런 이유로 외국의 경우 장기이식 관리기구는 모두 민간단체입니다. 일본도 국립사쿠라병원이 이를 관장하다가 미국의 민간기구인 장기분배종합네트워크(UNOS)를 본따 일본장기이식네트워크(JOT)를 만들었어요.

곽진영=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일반인들은 의사들이 적당히 죽었다고 한 뒤 장기를 떼가는 것이 아니냐는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기관이 관리하고 절차도 까다롭게 한 것은 이들의 저항을 고려한 것입니다. 외국에 준하는 유연성은 점차 확보합시다.

- 지금까지 장기이식과 기증운동을 해오시면서 잊지못할 일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곽진영= 1981년 어린 딸의 신장을 아버지에게 이식해준 적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이식을 결심하지 못하다가 고심 끝에 가장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이식에 응한 과정이나 장기이식이 일반화하지 않은 당시에 아버지가 이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모두 극적이었어요. 이 얘기가 어떻게 알려졌는지 KBS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이것저것 묻더니 「소망」이라는 일요아침드라마로 제작해 내보냈어요. 거기서 제가 주인공이었거든요. 완전히 스타였죠.

박진탁= 1994년 35세인 주부가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에 신장을 기증했어요. 수술을 했는데 이 주부가 패혈증에 걸려 깨어나지 않았어요. 걱정이 돼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보름만에 이 주부가 깨어났어요. 너무 기뻤죠. 그런데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이 주부가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이 『목사님,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라는 것이었어요. 원망을 들어 마땅한데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눈물이 나더군요. 어렵고 고통스러운 경험도 많아요. 1995년 한 신문이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가 장기를 매매하는 곳이라고 기사를 썼어요. 복지부의 감사를 받고 검찰에서 수사도 받았죠. 그러나 모든 것이 허위로 밝혀져 신문사는 사과하고 5억원을 물어냈어요.

- 우리나라는 장기가 항상 모자란 실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곽진영=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기증이나 뇌사자로는 안되겠다고 해서 요즘에는 각국에서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는 연구를 진행 중인데 이종의 장기를 이식받았을 때 항체를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제 철학은 적어도 가족 가운데 맞는 사람이 있으면 기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 기증이 활발해지면 신장의 경우에는 80%의 수요를 해결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가족들이 기증을 안해요. 장기매매가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죠. 기증이 가능한 가족들이 오히려 환자에게 『장기를 사라』고 권유하죠. 환자가 좀 어렵다 싶으면 장기를 구입할 돈을 모아주죠. 그러나 절대로 안될 일이 장기 매매입니다.

박진탁= 장기 이식 가운데 순수하게 주는 경우가 10~15%, 가족이 주는 경우가 30~40%, 뇌사자 기증이 10%입니다. 나머지 30~40%가 장기 매매에 의한 것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기 매매를 무겁게 처벌하는 법이 시행됨에 따라 장기밀매조직들은 일단 복지부동하겠지만 머지않아 법의 맹점을 파고들려고 할 것이 확실합니다. 당국의 강한 의지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곽진영= 뿌리깊은 유교사상도 문제입니다. 사망자에 대해 부검도 못하게 하는 현재 풍토로는 장기이식은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장기기증 의사를 밝힌 소년을 수술실에서 아버지가 끌고나간 적도 있어요. 이를 바꾸려면 언론이 나서야 합니다. 뇌사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뇌사자는 깨어날 가능성이 있는 식물인간과는 달리 일주일 안에 100% 숨지게 됩니다. 가끔 뇌사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보도가 있는데 이는 오보입니다. 뇌사는 뇌가 죽어 호흡조차기계에 의존해야 하는 상태로서, 무의식상태이지만 스스로 호흡을 할 줄 아는 식물인간과는 다릅니다.

박진탁=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종교인들은 1시간만 모아놓고 얘기하면 70~80%는 기증을 결심합니다. 지난해 8월15일 사랑의 교회에서 강연한 적이 있는데 1만3,000여명 가운데 5,500여명이 기증을 약속했습니다.

- 앞으로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해나갈실지 말씀해주시면서 끝을 맺죠.

곽진영= 평생의 꿈인 뇌사 관련법이 시행됐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정년까지 남은 4년을 이 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개선되도록 하는 데 쏟을 작정입니다.

박진탁= 시신을 기증한 분, 뇌사 혹은 살아서 장기기증을 한 분을 위해 기념공원을 만들 작정입니다. 장기기증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업이 될겁니다.

진행·정리 이은호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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