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지금 정치사회적으로 그 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마땅히 민주사회의 주인이어야 하는 민중이 그들의 힘을 되찾는 무혈혁명이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벌어지고 있다.그런데 온갖 시민단체들이 저마다 목청을 높이고 있는 요즈음 여성단체들의 움직임이 별로 조직적이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인구의 반이 여성일진대 국회의석의 반과 행정각료의 반은 당연히 여성의 몫이어야 하지 않은가?
가뭄에 콩 나듯 마지못해 하나 둘 끼워주는 장관자리와 여성의원의 비율이 막 공산주의의 허물을 벗은 동유럽 국가들보다도 낮은 나라에서 무슨 어쭙잖은 꿈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그래서 혁명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스웨덴에서는 이미 장관의 반 이상과 거의 반에 가까운 의원들이 모두 여성이다. 프랑스도 최근 각 정당이 남녀 후보자를 동등하게 공천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우리 나라라고 언제까지나 아랍 회교 국가들 수준에 머무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인간은 영장류 중 암수의 몸집 차이가 그리 큰 동물이 아니다. 동남아시아 열대림에 서식하는 긴팔원숭이는 영장류로서는 드물게 거의 완벽한 남녀평등사회를 이루고 산다. 암수간의 몸집 차이도 거의 나지 않는다. 인간 남녀간의 몸집 차이는 오랑우탄이나 고릴라에 비하면 훨씬 적고 침팬지에 비해서도 적은 편이다.
우리말로 「정치하는 원숭이」라고 번역된 책의 저자인 프란스 드발은 제인 구덜과 더불어 침팬지 연구의 선구자격인 학자이다. 언젠가 그는 『침팬지 암수 중 누가 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누가 더 몸집이 크고 힘이 세냐고 물으면 당연히 수컷이죠. 또 그들이 서로 마주칠 때 누가 더 높은 것처럼 보이느냐고 물으면 역시 수컷입니다. 그러나 누가 더 좋은 자리에 앉아 좋은 음식을 먹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단연코 암컷이지요』
침팬지 사회에서 앞에 나서서 힘을 과시하는 것은 수컷이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사실 암컷이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침팬지는 인간과 유전자의 거의 99%를 공유하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촌이다. 그들의 사회와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라도 비슷한 진화의 역사를 지닌다면 우리도 당장 동일한 숫자의 남녀 정치인을 세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여성이 실세가 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역 여성정치인들을 우선적으로 공천하라는 식의 운동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여성 정치인의 수를 늘이는 일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인 남성 정치인들을 확보하는 일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모든 후보자들의 여성문제에 관한 성적표나 장래 계획에 관한 공약을 정리하여 발표하면 어떨까? 반드시 공천 또는 낙천리스트를 국민의 손에 쥐어줄 필요는 없다. 유권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운동단체나 이익집단들이 미리 작성한 리스트가 아니라 후보자들의 자질과 행적에 관한 공정한 자료들이다.
/최재천 서울대교수 생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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