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세희씨는 1995년 겨울 프랑스 문화부가 주최한 「한국 문학 주간」 행사에 초청돼 10여명의 한국 시인, 작가들과 함께 파리를 방문했다. 르몽드의 문예난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의 프랑스 방문을 알리며, 그의 작품 세계를 크게 소개했다. 그러나 조세희씨는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행사 개막식에만 잠시 얼굴을 내밀었을 뿐, 본행사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그 대신 그는 파리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가 세계 제일의 이 관광 도시에서 유람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시위 노동자와 학생들 틈에 끼어 『솔리다리테(연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파리 시내를 누볐다. 그 해 겨울 파리를 비롯해서 프랑스 전역은 알랭 쥐페 정부의 사회 보장 감축 정책에 반대하는 총파업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지하철도 버스도 기차도 다니지 않았고, 우편물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68년 5월 이후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다. 노동자와 학생들의 시위가 정점에 이르던 날, 조세희씨는 어느 한국 신문사의 파리 주재 기자로부터 전두환씨가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96년 겨울, 조세희씨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노동자 집회장에 나가서 노동법의 개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외침을 들었다. 1년 전에 프랑스 노동자들 사이에 끼여 있을 때보다 몇 배나 더 큰 감동이 그의 몸안에서 일었다.
한편으로 그는 경제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의 높은 임금에서 찾는 정부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그는 국민의 5%를 차지하는 행복한 소수가 전 국토의 60% 가까이를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낙원」 속에서 슬펐다. 그는 그 때 세계에서 우리처럼 숨막히고 슬픈 모순의 나라는 눈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을 거라는 비감한 생각까지 했다. 한 해의 시간적 격차와 1만 ㎞의 지리적 격차를 둔 두 개의 노동자 총파업을 지켜 본 감회가 그 이듬해에 「당대비평」이라는 계간지를 창간하도록 그를 부추겼다. 그는 시인 문부식씨와 함께 97년 가을호로 「당대비평」을 출범시켰다.
「당대 비평」 창간호는 「자유와 평등을 넘어 사회적 연대로」라는 제목의 특집 아래 이집트 경제학자 사미르 아민의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하여」와 일본 소설가 오다 마코토의 「변화하는 아시아와 시민 연대」 등 네 편의 글을 모았다. 또 「한국을 지배하는 야만」이라는 기획 아래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장상환씨의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 갈등의 본질」 등 네 편의 글을 묶었다. 창간호에서 선보인 이 특집과 기획은 「당대비평」의 지향을 대략 알려준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지 10년 만에 나온 이 잡지는, 그 무너져버린 현실사회주의를 대안적 사회로 상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 비평」이 보기에 현실사회주의는 몰락했어도 노동자 계급은 여전히 존재한다. 97년 겨울호의 기획 「21세기 노동자의 운명」이나 99년 겨울호의 특집 「20세기와 노동의 운명」은 노동 계급의 진로에 대한 이 잡지의 지속적인 관심을 드러낸다. 민족 문제와 통일의 모색은 우리 사회 진보적 담론이 피해갈 수 없는 주제다. 한반도의 전쟁 위기와 북핵 문제를 다룬 99년 여름호의 특집 「잠복된 전쟁_ 야만의 시나리오에 저항하라」를 비롯해 이 잡지는 진보와 평화라는 관점 하에서 민족 문제의 해결을 모색해 왔다.
한국의 지적 담론의 지형 안에서 「당대 비평」의 자리가 꽤 왼쪽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이래 한국의 좌익 담론을 양분한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주의) 노선을 동시에 비판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진중권씨의 「지배의 언어, 탈주의 언어」(99년 봄호)에서 보듯이, 이 잡지는 기존의 경직된, 또는 추상적인 좌파에 대한 비판도 아끼지 않아 왔다. 말하자면 이 잡지가 진보적이라고 할 때 그 진보는 늘 실천 가능성의 영역 안에 있어 왔다.
이 잡지를 처음에 발의한 사람들이 문인들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 「당대비평」은 매호 빠짐없이 문학 작품을 싣고 있다. 당초 도서출판 당대에서 나오던 이 잡지는 98년 가을 겨울 합본호부터 도서출판 삼인으로 발행처를 옮겼다. 편집인은 여전히 조세희씨지만, 편집위원들이 늘어 지금은 시인 문부식씨 외에 문학평론가 손경목씨, 철학자 홍윤기씨, 사학자 임지현씨가 함께 이 잡지를 만들고 있다. /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창간사」
나 개인은 1995년부터 시작해 1997년까지 이어진 두 나라 노동자들의 투쟁, 즉 신뢰할 수 없는 권력이 결정하는 조건에 따르지 않겠다는, 미래를 위한 당당한 저항에서 배운 것이 많았다. … 20세기를 우리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보냈다. 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이 헤어졌고,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죽었다. 선은 악에 졌다. 독재와 전제를 포함한 지난 백년은 악인들의 세기였다. 이렇게 무지하고 잔인하고 욕심 많고 이타적이지 못한 자들이 마음놓고 무리져 번영을 누렸던 적은 역사에 없었다. 다음 백년의 시작, 21세기의 좋은 출발을 위해서라도 지난 긴 세월의 적들과 우리는 그만 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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