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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펄덕대는 새명성…여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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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펄덕대는 새명성…여성성…

입력
2000.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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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金宣佑·30)씨의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발행)은 살아 펄떡대는 시어(詩語)의 힘을 보여준다. 이제 너무도 흔한 용어가 되어버린 생명성, 여성성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풍요로운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읽는 이의 눈 앞에 펼쳐진다. 「죽음」 이나 「종말」 이란 암울한 단어들로 한국 시의 상황이 요약되던 1990년대를 막 지나 세기가 바뀌고, 천년이 바뀐 시점에 참으로 반가운 신인의 등장이다.「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얼레지」부분)

이 시구에 나오는 「대궁」 과 「격정」 은 김씨의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용어이다. 달리 「자궁」 과 「관능」 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김씨의 시들은 이런 용어들로 상징되는 여성성의 문제와 순환하는 생명성에 대한 탐구, 그리고 시대에 대한 고민을 고향의 추억을 빌거나, 시골 여인숙의 낙서와 얼룩 그득한 여관방 냄새를 빌어, 때로는 서울 신촌의 고깃집 풍경을 빌어서 풀어놓는다.

「어라연 계곡 깊은 곳에/어머니 몸 씻는 소리 들리네// - 자꾸 몸에 물이 들어야/숭스럽게스리 스무살모냥…/젖무덤에서 단풍잎을 훑어내시네//어라연 푸른 물에 점점홍점점홍// -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 시 「어라연」 에 나오는 어머니는 어릴 적 파밭에서 시인의 밑구멍을 애기호박잎으로 닦아주던 어머니다

「호박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양변기 위에서」 부분) 하시던 어머니다.

김씨의 시는 이렇게 이제는 잊혀져가는 추억을 아름답게 되살려주면서 여성의 건강성이라는 이념을 자연스럽게 육화시켜 보여준다. 시인은 끊임없이 「자궁에서 빠져나올 때 맡았던 바닷물 냄새」(「산청여인숙」부분)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회귀나 퇴행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의식과 관련돼 있다.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 자신이 죽거든 「깨끗이 화장해서 찹쌀 석 되 곱게 빻아/뼛가루에 섞어달라시는… 바람좋은 날/시루봉 너럭바위 위에 흩뿌려달라시는」어머니이다.

시인은 「아기 하나 낳을 때마다 서 말 피를 쏟는다는/세상의 모든 엄마들처럼/수의 한 벌과 찹쌀 석 되/벽장 속에 모셔놓고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모성과 생명의 윤회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복숭아 열매가 둥글게 자라는 건 열매가 갖고 있는 기억 때문」이라고 할 때 시인은 「둥글고 따뜻하던 양수의 기억」을 말하고 있다.

때로 그의 시적 대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이 된다. 그에게 「보도블록을 깨다 손목 베이자 불타는 머리칼, 바리케이드 위에 살점을 널던 팔십년대」 는 외상(外傷)의 시대였다면 「구십년대는 우울한 내상(內傷)의 날들이어서/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멍만」 드는 시대였다. 피냄새가 진동하고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이번 시집의 표제작은 바로 현실상황과의 싸움을 그로테스크한 관능성으로 그리고 있다.

「나」 는 피를 빨아먹는 선형동물인 「그」 를 밤마다 죽일 궁리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장가를 불러주며 나의 사타구니 살갗까지 벗겨낸다. 나는 오늘 또 한번 그를 죽이지만 결코 그는 죽지 않는다. 「내 혀는, 그의 입 속에, 비굴하고 착하게 갇혀있으니까요」. 그는 바로 노동요를 부르며 보너스를 기대하는 우리 삶을 옥죄는 괴물스러운 현실이다.

김씨는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96년 등단했다. 안도현 이윤학 나희덕씨 등 쟁쟁한 멤버들이 있는 「시힘」 의 동인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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