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도기행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
1622년의 오윤겸(吳允謙) 사행, 1623년의 이경전(李慶全) 사행, 조 즙(趙 즙) 사행은 개원사(開元寺)에, 1624년의 이덕형(李德泂) 사행은 보정사(普靜寺)에 묵었다. 개원사는 당나라의 개원 연간(713∼741)에 세워진 천년 고찰(古刹)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쓴 일본 스님 엔닝(圓仁)이 덩저우(登州) 원덩(文登)현에 있는 신라 절 「적산신라원(赤山新羅院)」의 비호를 받고 839년 구도(求道)의 길을 떠나 덩저우 성내를 지날 때 머물던 곳이다. 이경전 사행의 경우 유서 깊은 개원사에 머물렀지만 불결하여 이가 들끓어 여염집인 여씨 집으로 옮기기도 했다. 지금은 두 절 다 없어진 지 오래다.
조선 사행의 덩저우 상륙은 명나라에의 정식 입국이다. 순무(巡撫·지방 장관 격)를 비롯한 고위 관료를 만나 입국, 통관 및 내륙여행 절차를 밟고 또 아울러 외교 교섭도 벌여야 한다. 한·중 간에 중요한 외교·군사 문제가 발생할 때 조선 사절과 등래(登萊) 순무 사이에는 불꽃 튀는 외교 교섭이 펼쳐지기도 한다. 1623년 인조 반정 직후에 책봉(冊封·정권 승인) 요청으로 파견된 이경전 사행은 덩저우의 정치적 관문에서 호된 고초를 치러야 했다. 이때 순무 원가립(袁可立)은 앞서 조선정변의 첩보를 받고 인조 정권을 왕위 찬탈한 불법 정권으로 간주한 것이다. 조선 문제의 창구인 등래 순무의 향배(向背)는 명 중앙 정부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경전 사행은 원가립을 설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6월 14일 회견에서 원가립은 『구왕(舊王·광해군을 말함)」은 살아 있는가? 구세자(舊世子)는? 구왕이 3월 13일(반정의 날) 죽었다고 하는데? 궁궐도 탔다는데?』라고 물었다. 이경전 사행은 『구왕과 세자는 탈 없이 모두 살아있고 구왕이 3월 13일 죽었다는 것은 낭설이다. 또 궁궐이 소진(燒盡)했다는 것은 실화(失火)로 일부만 탄 것이고 정전(正殿)은 무사하다』고 답변했다. 원가립은 이어서 『3월 13일 군사를 동원한 것이냐? 구왕이 자진사퇴한 것이냐?』고 반정의 기본 성격을 날카롭게 질의했다. 이경전 사행은 맞서서 『모든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스스로 합심해서 새 임금님을 모신 것이지 군대를 동원한 것이 아니다(大小臣民 不謀而同 推戴新君 豈有動兵之事)』라고 군사 쿠데타를 부정하는 정치적 거짓말을 해서 겨우 고비를 넘겼다.
이경전 사행 다음의 조 즙 사행도 순무 원가립의 심문을 받았다. 『구왕은 어디 있는가?』에 『서울 지방에 있다』고, 『구세자는 어디 있는가?』에 『같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것은 조 즙이 둘러 댄 거짓말이다. 구세자가 인조에 의해 강화도에서 사사(賜死)한 것은 6월 25일, 조 즙이 서울을 하직한 날은 7월 27일이다. 명과의 정치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구세자의 처형 사실을 조 즙은 기지(機智)로 숨긴 것이다. 또 조선 병력의 규모를 물어 오자 국경지대에 배치한 1만 명 외에 병력이 없다고 축소 답변했다. 이것은 명 측의 질의를 예상한 비변사(備邊司·국가안보회의)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참으로 허허실실한 외교 공방의 장이다.
1624년 이덕형, 홍익한 사행이 만난 순무 무지망(武之望)도 구왕의 안부를 묻기는 했으나 별 문제는 없었다. 한·중 간의 최대 외교쟁점인 「책봉」문제는 이미 해결됐으나 명의 조사(詔使·조선 국왕을 승인하는 명의 공식 사절)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덕형 사행은 무지망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한편 덩저우부의 동지(同知) 적동(翟棟)으로부터 『조선은 장기 쪽처럼 임금을 바꾼다』고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적지 않은 명의 관료들은 「반정」을 도덕성 없는 하극상 사건으로 본 것 같다.
조선 사절이 베이징(北京)을 오가는 길에 덩저우에서 만난 잊지 못할 사람이 있다. 그는 랴오둥(遼東)에서 피난 와서 개원사에 묵고 있는 오청천(吳晴川)이다. 신수 좋고 글을 잘해 조선 사절과 시를 주고 받을 정도로 막역한 벗이 되었다. 간난한 피난살이의 그를 조 즙과 홍익한은 쌀과 돈으로 돕기도 했다. 난민 지식인 오청천을 홍익한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나이는 일흔 남짓, 홍안백발, 마치 신선 같고, 맑고 깨끗한 담론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몸과 마음이 한결같다」
그는 1623년 이경전 사행부터 1630년 최유해(崔有海) 사행까지 줄곧 조선 사절과 교유(交遊)했으나 그 뒤는 기록이 없어서 영영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린다. 김상헌(金尙憲)과 오청천의 만남은 우정의 절정이다. 김상헌이 덩저우를 떠나면서 그에게 준 장시의 마지막 구절. 「친구여! 취하도록 마시고 답답한 것 떨쳐 버리게/ 사람이란 태어나면 모두가 형제이거늘/ 내일은 그대와 작별해 연산(燕山·베이징)으로 가는 날/ 흰 구름 누런 단풍, 나그네 시름은 가이 없어라」
필자가 이 곳에서 만난 잊지 못할 사람은 두 사람, 펑라이시 관광 국장 겸 문화재 국장 자오징원(趙景文)씨와 문화재국 연구원 웬샤오춘(袁曉春)씨이다. 자오씨는 인민해방군 출신으로 50대의 중후한 인품이고, 웬씨는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단아한 30대의 신사. 그는 중국 조선학회 이사직도 맡고 있으며 1984년 고선(古船) 발굴팀에 참여해 발굴 보고서인 「봉래 고선과 등주 고항(蓬萊古船與登州古港)」을 펴내고, 한국의 국제학술회의에도 참가한 소장학자다. 한·중 관계사에 관심이 매우 크다. 그의 안내와 도움으로 펑라이시의 사적 답사는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등주고선박물관」에는 원나라 군선이 통째로 전시되어 있다. 상층 구조물은 없고 선체는 다소 부식했지만 거의 완벽한 원형이다. 전시품 중에 우리 것 두 점이 있는데 연대 미상의 구리 그릇(銅碗)과 고구려 토기병(泥質紅陶甁)이다. 또 펑라이의 명소로는 이곳 출신의 명나라 때 왜구를 물리친 명장 척계관(戚繼光)의 사당과 패방(牌坊·우리나라 홍문과 비슷)이 있다. 척계광은 우리의 이순신 장군처럼 중국사의 빛나는 인물이다. 그가 쓴 병서 「기효신서(紀效新書)」는 임진왜란 후 우리 군대의 편제, 전술, 훈련 등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여섯 번째 그림은 덩저우성을 출발한 이덕형, 홍익한 사행의 행렬도이다. 말(노새)을 탄 수행원이 앞, 옆, 뒤에서 호위하고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실은 말이 선도하고 정사(이덕형), 부사(오 숙), 서장관(홍익한) 등이 탄 가마 셋이 뒤따른다. 가마꾼은 네 사람 씩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자(咨)」(咨文의 준말로 외교문서인데 表文, 奏文, 咨文 등을 아울러 이른다)라고 쓴 말은 외교 행낭을 실은 말인데 문서의 존엄성 때문에 문서를 실은 말이 행렬을 선도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엄격한 사대외교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또 삼사(三使)가 탄 가마 셋은 사실은 두 개라야 한다. 홍익한은 가마 타기를 굳이 사양하고 은 6량을 주고 노새를 빌려 탔다. 화가는 굳이 사실대로 그릴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길가에 죽 늘어선 버드나무 가로수는 조 즙이 『길 양쪽에 버드나무를 빽빽하게 심어서 한 곳도 빈 데가 없다』고 묘사한대로 실경을 정확하게 옮긴 것이다.
박태근
명지대·LG연암문고 협찬
■1631년 덩저우(登州)에서 조선인과 유럽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베이징(北京)으로 파견된 조선 사절인 진위사(陳慰使), 정두원(鄭斗源) 사행과 예수회 신부인 포르투갈 사람 조안 로드리게스(Joao Rodrigues, 중국이름 陸若漢)와의 만남이다. 덩저우 땅이 우연하게도 조선과 서양의 만남의 장이 된 것이다.
정두원 사행은 1630년 덩저우를 통해 명에 입국, 1631년 역시 덩저우를 거쳐 출국했다. 만남의 정확한 시기는 1631년 출국할 때이다. 로드리게스는 1577년부터 33년이나 일본에 체류하면서 유창한 일본말로, 통역과 외교면에서 크게 활동했다. 그는 일본어 문법책인 「일본어대문전(大文典)」과 「일본교회사」를 저술했고 1610년 일본에서 추방된 후 중국에 와 죽기까지 23년을 있었다.
로드리게스는 명나라 중앙 정부의 요청으로 마카오에서 차출된 포병 부대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갔다. 그 뒤 기독교 신자인 등래(登萊) 순무(巡撫) 손원화(孫元化)의 요청으로 이곳 덩저우로 군사지원차 왔다가 체류 중인 조선 사절과 접촉했다. 로드리게스는 이국인인 조선 사절에게 매우 이례적으로 푸짐한 선물을 주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다, 모든 선교사가 그렇듯 조선 땅을 앞으로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선물은 책과 물건인데 책은 성서나 교리서가 아니고 천문학, 지리, 지도, 역서(曆書), 망원경 해설, 총포(銃砲) 해설 등 실용·과학 서적이다. 물건은 망원경, 시계, 화약, 총포, 목화 등인데 소총은 조선이 이미 가지고 있는 화승(火繩)식이 아니고 부싯돌로 발화하는 당시의 신식 소총, 이른바 「수석식」(燧石式)소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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