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의 현 주소는 노동시장에서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사상 최장기 호황이 이뤄진 199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무려 2,200만개. 인구 6명당 1개꼴이다. 실업률은 97년 5%를 밑돈뒤 지난해말에는 4.1%로 1970년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평균임금 상승률은 전년(4.2%) 보다 낮은 3.6%에 그쳤다.
실업률이 일정 수준이하로 내려가면 임금이 오른다는 필립스 곡선과 반대되는 현상이다. 또 실업률이 줄어들면 한계노동력의 질이 낮아져 생산성이 하락한다는 종전의 경제이론도 미국에선 「예외」가 됐다.
『생산성에 관한 퍼즐보다 어려운 퍼즐』이라는 폴 크루그만 MIT대 교수의 지적처럼 미 노동시장은 수수께끼로 불린다. 몇가지 추론이 있을 뿐 해답은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추론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값싼 노동력의 유입이다. 정보통신분야를 중심으로 급팽창한 노동수요를 메운 것은 여성과 퇴직자, 대학생 등이었다.
취업자중 여성의 비율은 10년새 57%에서 61%로 높아졌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나타났던 조기퇴직 추세도 주춤거리고 있다. 이들은 대개 임시·일용직으로 취업하는데 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중 10%가 인력파견업체에 의해 충당됐다.
이민자의 증가도 빠뜨릴 수 없는 대목. 현재 500만명이상으로 추산되는 불법이민자는 임금상승 압력을 낮추는데 기여했다. 곧 기업들이 필요 인력을 기존 근로자 대신 낮은 임금에 교섭력도 떨어지는 신규 취업자로 채우면서 「저실업_저임금 구조」가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물가안정과 임금구조의 변화 등도 설득력 있는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우선 강한 달러와 생산성 향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억제되면서 임금상승 요구도 둔화했다는 것이다. 또 성과급, 스톡옵션 등 과거 임금통계에는 잘 잡히지 않는 보수가 늘어난 것도 명목임금을 하향안정화시킨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물론 전통 이론에서 벗어난 미 노동시장의 움직임이 정보화로 이행되는 기술변혁기의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신경제」의 한 축임에는 분명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 경제가 연 4% 성장하는데 생산성 향상이 3분의 2를, 「노동 투입」으로 불리는 고용증가가 나머지를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미국의 취업자 7명중 한명이 보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직장을 그만두었다. 값싼 노동력의 유입과 임시·일용직 근로자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새 일자리를 찾아 현 직장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의 노동시장이 유연하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유연한 노동시장 덕분에 근로자들은 더 생산성 높은 일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다. 「US.com」의 주가가 당분간 상승세를 탈 것이라는 주장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근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희경기자
hkjung@hk.co.kr
■[us.com107개월 호황] 고용불안 불구 직장구하기 쉬워
사상 최장기의 호황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직장에서 겨나고 있다. 지난해 해고 또는 감원된 미국인 근로자는 70만명에 가깝다. 10년전인 1989년 10만명 남짓이 해고 또는 감원된 데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숫자다.
한 직장에서의 근속 년수도 갈수록 짧아져 98년의 경우 평균적인 근로자들이 현재 직장에서 계속 근무한 년수가 3.8년에 불과했다. 32세 근로자의 경우 평균 9군데의 직장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근로자들의 평균 노동시간도 길어지고 있다.
미국 근로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지난 1998년 1,957시간에 달해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서방선진 7개국(G7)가운데 가장 길었다. 또 선진국가운데 유일하게 90년보다 연간 노동시간이 많아졌다.
해고·감원의 증가, 근속연수의 단축, 노동시간의 연장과 같은 현상은 캘리포니아주가 더 심하고, 그중에서도 인터넷 등 첨단기술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실리콘 밸리가 특히 더하다.
캘리포니아주의 근로자중 절반정도가 현 직장에서 근무한 지 2년이하고, 실리콘 밸리의 근로자들은 주당 60시간이상 일하는 게 보통이다. 호황의 진원지에서 더 극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유에스뉴스 앤 월드리포트는 지난해 1,700만명의 미국 근로자들이 새로운 직업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보도했다. 불과 5년전만 해도 이 숫자는 600만명에 불과했다.
「안정된 직장」이 사라지고, 근무강도는 더 높아지고 있지만 최근 한 조사 결과 91%의 미국인들이 현재의 직업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유연한 노동시장이 근로자를 행복하게 한다』는 낙관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박정태기자
jt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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