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기행] 原型의 섬-진도의 노래방진도는 원형(原型)의 섬이다. 음악과 놀이와 그림과 무속의 원형이 이 섬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서 완성되었다. 이 원형들은 굳어져버린 틀이 아니라, 삶과 함께 출렁거리는, 열려진 표현양식이다. 「진도 들노래」는 김매는 대목에서는 한없이 느리고 유장한 진양조 장단으로 흘러간다. 그러다가 새참을 머리에 인 아낙네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 장단은 돌연 신바람 나는 자진모리로 바뀌어, 일의 신명과 밥의 신명은 하늘에 닿는다.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는 섬의 서남쪽 바닷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오랜 세월동안 함께 모여서 노래를 해 온 주부, 할머니들의 자생적인 노래방이 있다. 도시에 가라오케 노래방이 창궐하기 훨씬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노래모임을 「노래방」이라고 불렀다. 노래가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서 작동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포리 노래방은 한국 노래방의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날이 저물면, 저녁 설거지를 마친 주부들은 이 마을 한남례(69, 별도기사 참조)씨 집 사랑방에 모인다. 노래방 회원은 30명 정도지만, 실제로는 15~17명정도가 모인다. 조정심(50)씨가 가장 젊고 고연기(75) 할머니가 최고령자다. 이 노래방의 악기는 북과 바가지가 전부다. 북채를 쥔 한남례씨가 악장 격이다. 한씨의 북에 맞추어 주부들은 진도 들노래, 육자배기, 흥타령, 단가, 판소리를 부른다. 육자배기를 부를 때는 한 소절씩 노래를 돌리는데, 대체로
나이 순서에 따른다. 둥덩이 타령을 부를 때는 북은 물러가고 다들 손바닥으로 바가지를 두들기며 합창한다. 앉아서 노래하는 사람들의 어깨가 흔들리고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그러다가 신명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이 방 한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면, 몇 명이 따라 일어서서 함께 춤을 춘다. 이 노래방은 겨울이 한철이다.
노래방 주부와 할머니들은 다들 억척스런 농사꾼들이다. 들일, 밭일에 집안일까지 한다. 농사가 시작되는 2월부터는 모임 횟수가 줄어들고 여름에는 모이지 못한다. 여름이라도 비가 쏟아져서 일하지 못하는 날에는 모여서 노래한다. 이런 날에는 한남례씨가 집집마다 돌며 『날도 궂은데 한판 놀아보더라고』라며 노래꾼들을 모은다.
소포리 노래방의 역사는 오래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겨울이면 이집 저집 사랑방을 옮겨다니며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일제 때 이 노래방 활동은 금지되었다. 해방 되던 해 노래방은 다시 결성되었다. 이 때는 남자들의 노래방이었다. 광복과 함께 공동체의 기상을 회복하기 위한 자생적 노래운동이었다.
집단적 역동성을 표출하는 농악과 군무가 성행했다. 1973년 이 마을 앞바다는 방조제로 막혔다. 농토가 늘어나 주민들의 삶은 소금을 구워서 먹고 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넉넉해졌다. 그러나 왠지 노래의 신명은 빠지는 듯했다. 농사는 기계화되었고, 남자들의 노래방은 이 해에 슬그머니 없어져버렸다. 소포리 노래방은 이 무렵에 이 마을 40대 주부들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노래방 초기에 주부들에게 노래를 지도했던 정채심(여)씨와 김막금(여)씨는 진도 들판에서 들노래의 거장들이었다. 그들은 직업적 성악가가 아니라 한평생 논일을 했던 농사꾼이었다. 그들은 5년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소포리 노래방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들노래를 할 때 방바닥에 모를 꽂는 시늉을 한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의 내용과 정서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의 노래를 노래하지 않았다. 소포리의 겨울은 신명이 뻗쳐오른다. 지금은 설날 다함께 모여서 놀 강강술래를 연습하고 있다. 그 신명의 힘으로 소포리 사람들은 새 봄의 노동을 예비하고 있었다. /김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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