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8일 눈 쌓인 제주도 해변을 두 남녀가 한여름처럼 거닐었다. 반바지차림의 남자와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햇빛이 따갑다는 표정이다. 패션모델인 그들은 「여름의 환상」을 만들고 있다. 카메라 앵글 속에 비친 제주도 해안은 영락없이 시원한 여름바다. 그러나 카메라 뒤편은 눈꽃이 성성하고 해변은 칼바람이 분다. 캐주얼 브랜드 「헨리 코튼」의 봄/여름시즌 카탈로그 촬영현장이다.이탈리아 모델들은 연신 코를 훔치고 급기야 『못 하겠다』고 투정을 했다. 하지만 20년 경력의 사진작가 정용선씨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강행군. 『포즈를 인위적으로 만들지 말라니까』 『좀더 강하게!』 어느 순간 작가와 디자이너가 『그거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즉흥적인 포즈가 꼭 원하던 컷이었다. 코디네이터는 틈만 나면 화장을 고치고 묻은 실밥을 뜯어낸다.
바다쪽이 전면 유리로 된 한 횟집은 근사한 별장으로 변신한다. 바로 옆엔 생선회 접시가 늘어서 있지만 예쁘게 만든 유리창 세트를 잡은 앵글 속만은 영락 없는 바닷가 별장이다. 유리창 너머 지저분한 뒷배경은 컴퓨터 수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보통 1월에 봄/여름 사진을 찍는 까닭에 패션 카탈로그 촬영은 늘 이렇게 계절에 역행한다. 아니 계절은 애초부터 상관이 없다. 패션 상품은 철저한 계산 속에 만들어진 「이미지」다. 패션업체의 MD(시장조사 소재발굴 마케팅등을 총괄하는 브랜드 책임자)와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브랜드 이미지에 따라 광고대행사의 기획자와 아트디렉터가 카탈로그의 전체 주제를 잡는다.
이 과정엔 싸움같은 격론이 종종 있게 마련이다. 헨리코튼의 이번 시즌 주제는 「긴장과 절제」.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총대는 다시 사진작가에게 넘어간다. 보다 그럴듯한 이미지를 시각화하기까지 때론 흰 눈발을 속이고 컴퓨터작업으로 파도를 일으키는 가공을 거친다.
『수없는 브랜드가 왜 나타나고 사라지겠는가. 일관된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탈로그 제작을 맡은 광고대행사 gfa 정선운기획실장의 설명이다. 소비자가 어떤 브랜드를 사면서 품위가 있다거나 자유로운 느낌이라는 식의 만족감이 없다면 더 이상 그 옷에 손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27일 첫 컷을 찍는데 정용선씨는 15장짜리 필름 7통을 썼다. 하루종일 찍은 컷은 기껏 7컷이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패션] 브랜드 이미지 카탈로그로 차별화
패션업체들이 카탈로그에 들이는 공은 유다르다. 카탈로그는 고정고객에게 발송되고 시즌 내내 광고·홍보 자료로 활용된다. 그러나 이미지를 생성하는 방법은 브랜드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남성복 위주의 LG패션은 카탈로그를 꼼꼼이 보지 않는 남성들의 시선을 오래 잡아놓기 위해 잡지형식의 매가로그(매거진+카탈로그)를 선보였다. 올 봄/여름용으론 대전의 화랑, 제주도의 소리박물관, 이탈리아 명차 포르셰를 배경·소재로 삼아 마에스트로, 벤추라, 파시스의 사진을 찍었다.
미술, 고유의 소리, 명차라는 주제에 맞게 빼곡히 읽을거리도 넣었다. LG가 3개 브랜드 통합 매갈로그를 제작하는 데 든 비용은 총 1억5,000만원. 대신 고급예술과 명차의 이미지를 브랜드에 버무렸다.
신원처럼 대중적인 브랜드를 갖는 업체는 빅 모델이 결정적이다. 베스띠벨리, 씨, 아이엔비유, 비키, 지이크 5개 브랜드의 봄 카탈로그 제작비가 총 3억원. 모델료는 별도다.
베스띠벨리의 3년 장기모델인 김희선은 연 2억원, 채림은 1억5,000만원에 계약돼 있다. 제작비보다 몇배 많은 돈이다. 신원, 나산, 대현같은 패션업체가 모델료를 아끼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기본스타일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IMF 이전 연간 매출이 1,000억원 이상, 최근에도 500억~600억원씩 하는 이른바 「볼륨 브랜드」라면 누구든 싫어하지 않을만한 모델에 목을 맨다.
지난해 김희선이 드라마 「토마토」에서 베스띠벨리의 크롭트 팬츠를 입자 2주만에 매진됐을 정도로 그 파급력은 엄청나다. 반대로 최근 N세대 모델로 부상한 김민희, 김효진은 씨의 보조모델로 지명도를 얻은 경우.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캐릭터 브랜드」일수록 대중적 모델보다는 전문 모델을 써서 이미지 컷에 치중한다. 옷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이도록 하기보단 첫 눈에 어떤 분위기를 전달하려는 것.
베네통이 파격광고로 성공했고 패션쇼에서 「안 입히는 옷」을 선보이는 이유가 이런 시선끌기의 수단이다. 외국인 모델을 썼을 때는 십중팔구 라이선스브랜드다. 외국에서 건너 온 이국적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외국인 모델의 모델료는 국내 톱 탤런트에 비하면 10분의1이 안 된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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