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도 기행] 고대교류의 관문 덩저우■연행도
관동대 박태근 객원 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씨가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서 발굴한 조선중기 기록화 「연행도폭(燕行圖幅)」은 1624년 조선 인조의 왕권 승인을 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홍익한(洪翼漢) 일행의 행적을 담은 국내 유일의 해로 연행 화첩입니다. 낙장이나 파본 하나 없는 25장 그림은 평북 선사포(宣沙浦·평북 곽산)항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조선 중기 회화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
연행도 기행 (4) 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
고대 동아시아 바닷길의 중요한 항구였던 덩저우(登州)항은 명나라로 접어들면서 지난날의 국제적 명성과는 달리 한낱 지방항구로 전락한다. 명은 중국대륙의 남북 물류를 운하 체계로 운송했기 때문에 역내 해운이 쇠퇴하면서 덩저우항은 중국 동북부 랴오둥(遼東) 지역의 수송기지로서 명맥을 잇게 된다.
그러던 중 덩저우에도 반짝 경기가 찾아왔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걸쳐 한반도의 조선전쟁(임진왜란)과 랴오둥지방의 대청(對淸)전쟁으로 인한 한시적인 전쟁 경기로 덩저우는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이 기간 중 덩저우에서 랴오둥으로 매년 70만 석씩 곡물을 수출했다고 한다.
조선전쟁은 끝났지만 랴오둥지역 대청전쟁의 발생으로 덩저우는 중요한 군사기지로 재부상한다. 1621년 6월 명의 병부시랑(兵部侍郞·국방차관) 웅정필(熊廷弼)이 대청 군사전략으로 이른바 「삼방포치론(三方布置論)」을 펴냈다. 이는 청과의 주요 전장(戰場)인 광닝(廣寧·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베이전(北鎭)시)을 톈진(天津)과 덩저우의 수군력이 엄호하는 삼각(三角) 전선으로 구축하고 톈진과 덩저우에 고위직인 「순무(巡撫·성의 최고 지방장관)」를 신설하자는 것이다.
웅정필이 대청전쟁의 총사령관인 랴오둥경략(經略)으로 임명된 1621년 6월 6일. 같은 날 덩저우의 지방관인 도랑선(陶郞先)은 순무로 격상, 발령되었다. 군사령관인 부총병(副總兵) 심유용(沈有容)도 총병으로 진급했다. 한편 랴오둥 지역의 중심 선양(瀋陽), 랴오양(遼陽)이 함락된 후 덩저우에 유입된 수만의 난민을 병력으로 재편성하기 위해 역시 난민 관료인 유국진(劉國縉)을 고위직인 산둥안찰부사(山東按察副使)로 임명했다. 국제적으로는 조선사절의 중국 통로가 새로이 해로 항해, 덩저우 경유 내륙 통행으로 결정되면서 덩저우항은 잠정적이나마 국제항의 옛 기능을 다시 회복한다. 덩저우는 늘어난 관료 그룹, 군인, 외국인(조선사절단), 난민, 장사치, 한탕 투기꾼, 심지어 건달 등 시정잡배까지 모여들어 공전의 성시(成市)를 이루었다.
뤼순(旅順)지구까지는 평료(平遼) 총병관 모문룡(毛文龍)의 관할이고 버하이(渤海)해협의 먀오다오(猫島) 군도부터는 덩저우 총병 심유용의 관할이다. 조선사절단은 먀오다오 군도의 기항지마다 심유용 부대의 검문을 받으면서 덩저우항에 도착해 일단 「수성(水城)」의 수문 밖에 정박한 다음 상륙한다.
수성은 오랜 역사와 독특한 구조를 지닌 덩저우 고유의 수군기지이다. 1042년 송나라 때 처음 창설된 후 명나라 초인 1376년에 수성으로 증축해 1596년 다시 개축한 것이 오늘날까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완벽한 고대 수군기지로 꼽혀 봉래각(蓬萊閣)과 더불어 1982년 중국 국보로 지정된, 펑라이(蓬萊·옛 덩저우)시가 자랑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수성의 구조는 매우 독특하다. 북쪽은 바다를 향해 돌출한 단애산(丹涯山) 남쪽자락의 하도(河道)에다 해수를 끌어들여 인공 내해(內海)를 만들었다. 성문은 두 곳으로 북쪽(바다)은 수문이고, 남쪽(육지)은 「진양문(振揚門)」이다. 수문 양쪽에 포대를 만들어 둘레에는 견고한 성벽을 쌓고, 그 밖의 부두, 방파제, 등대, 망루, 포대 등 온갖 군사시설물을 두루 갖춘 총면적 약 27만㎡의 대규모 수군기지이다. 중심인 인공 내해는 「소해(小海)」라 부르며 남북 길이 650㎙, 평균 너비 100㎙, 둘레 1,500㎙, 총면적 7만㎡ 정도이다.
홍익한(洪翼漢) 일행이 이곳에 닿았을 때는 소해에 들락거리는 명 수군의 온갖 군선(軍船)으로 장관을 이뤘을 것이리라. 홍익한은 소해 군항에 온갖 군선이 형형색색의 기류(旗旒)를 펄럭이며 들락거리는 광경을 한문 특유의 멋진 대구(對句)로 산문시처럼 묘사했다. 「벼랑 아래에 큰 못을 만들고 안에 물꼬를 터서 바닷물을 끌어들여 성을 만들고 군선을 들고 나게 했다. 큰 배 작은 배가 꼬리를 물고 들락거리고 즐비하게 치솟은 돛대와 삿대는 항구에 가득하다」(崖下渚爲大池 內呑疏渠 外引遠潮 劃城一面 出納戰艦 黃龍靑雀 首尾相接 萬櫓千帆 簇族基中).
조선사절단의 배가 「소해」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아마도 중국 쪽이 외국 선박의 소해 입항을 허락하지 않아 수문 밖 외항에 정박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옛 군항인 소해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도 살아 숨쉬는 어항으로 있다. 무수한 어선이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쉴새없이 들락거리고 아침이면 버하이, 황해 수역의 풍성한 어족(魚族)으로 어시장이 펼쳐진다. 부둣가 군데군데 무더기로 쌓아올린 밤새 잡아 건진 살아 꿈틀거리는 온갖 생선, 바닷가재, 새우, 조개 등이 눈에 뿌듯하고 뱃사람, 장사치들의 요란한 흥정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은성(殷盛)했던 옛 덩저우를 기리기 위해 소해 동쪽 연안에 약 500㎙ 길이의 고전풍 상가를 조성해 이름하여 「덩저우 고시(古市)」. 여관, 식당, 건어물전, 잡화점, 기념품점 등이 주욱 들어선 펑라이시를 찾는 나그네의 마음을 달래준다. 1984년 소해 서남쪽 부둣가 바다밑 2.1㎙ 지점에 묻혀있는 고선 세 척을 발견해 그중 한 척만 발굴하고 나머지 두 척은 아직 그대로 있다. 출토한 한 척은 길이 28.6㎙, 최대 너비 5.6㎙, 높이 1.2㎙의 원(元)대 군선(목선)이다. 온전한 모습으로 현재 「고선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중국에서 출토 인양한 첫 번째 고대 군선으로 펑라이시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문화재다.
「봉래각」은 「봉래각」(1061년 송나라 때 창건) 「천비궁(天妃宮)」(1122년 창건)을 비롯한 20여 채로 이뤄진 고전 건물로 덩저우의 상징이다. 중국 대륙 산둥반도의 동쪽 끝인 이곳 펑라이시 단애산 바닷가 절벽 위에 치솟은 오색 영롱한 봉래각은 꺼지지 않는 신기루처럼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봉래각 아래 일렁이는 망망대해는 왼쪽은 버하이고 오른쪽은 황해다. 이곳에서는 먼 옛날부터 자주 신기루가 떠올랐다. 중국인은 「해시(海市)」라 일컫는다. 바다의 도시라는 뜻이다. 내륙에 사는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바다를 동경했고 가없는 바다 저편에 미지의 영원한 이상향을 그렸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서복(徐福)을 바다로 보냈다는 곳이 펑라이다. 대기의 광학현상인 신기루를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고대 중국인들은 신기루를 피안의 이상향으로 굳게 믿었던 것이다.
봉래각에는 소동파(蘇東坡)의 해시 시비(詩碑), 진박(陳搏)의 「수(壽)」자, 「복(福)」자 대자비(大字碑)를 비롯한 역대의 명비, 편액이 즐비하다. 조선사절들은 덩저우에 올 때마다 자연과 인간이 손잡은 절묘한 공간인 봉래각을 꼭 찾았다. 홍익한보다 한해 앞선 1623년 이경전(李慶全) 사행의 서장관인 이민성(李民宬)은 이렇게 읊었다.
「이 세상 남자로 태어나서/ 덩저우 땅 밟아 본 사람 얼마나 되겠소/ 신기루도 사람도 덧없이 가는 것/ 하지만 소동파의 시는 천 년을 산다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박태근
■[연행도 기행] 고대교류의 관문 덩저우
펑라이(蓬萊)시의 옛 이름은 덩저우(登州)부다. 산둥(山東)반도의 최북단으로 동경 120°35'에서 121°09', 북위 37°25'에서 37°50'이며 인구는 약 50만 명이다. 지금은 19세기 말부터 급부상한 신흥 항만도시인 옌타이(烟台)시에 속해 있지만 지난 날은 산둥반도에서 으뜸가는 도시였다.
펑라이시는 「봉래각」 「수성」 등 오랜 역사문화유산과 버하이(渤海) 황해 연안의 뛰어난 자연경관 그리고 특산인 사과, 포도, 해물 등 풍성한 먹거리로 이름난 중국 굴지의 관광도시이다. 특히 와인은 이른바 「옌타이 와인」으로 이름이 높다. 오늘날 우리는 한낱 낯선 외국 도시로 생각하지만 역사 공부하는 사람치고 덩저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도시는 고대사의 「슈퍼스타」이다.
이제 펑라이는 결코 먼 외국도시가 아니다. 인천항에서 페리로 웨이하이(威海)항에 닿은 후 자동차길로 두 시간 정도면 펑라이에 도착한다.
펑라이의 황금시대는 신라·당나라 때, 국제항로가 번성했던 7∼9세기이다. 당시 덩저우에는 신라와 발해 시절의 공관인 신라관, 발해관이 있었고 덩저우 관내의 원덩(文登)현에는 그 유명한 장보고 장군이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과 신라방이 있었다. 신라 의상대사를 사모했던 선묘(善妙)도 이곳 신라방의 아가씨이다. 고려도 신라의 뒤를 이어 덩저우를 1074년까지 계속 중국 항로의 기점으로 삼았으나 거란의 압력으로 밍저우(明州·저장(浙江)성 닝보( 寧波)시)의 남방항로로 바꿨다.
그 뒤 한반도와 덩저우는 오랫동안 단절되었으나 고려 말 조선 초에 잠시 바닷길이 열려 우리 사절이 명의 수도인 난징(南京)을 내왕했다.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권 근(權 近), 이 첨(李 첨) 등이다. 이들은 개성 또는 서울을 떠나 육로로 랴오둥(遼東)반도 뤼순(旅順)에 닿은 후 길을 단축하기 위해 버하이 해협을 지나 덩저우에 상륙한 다음, 육로로 난징에 이르렀다. 이들이 남긴 시문을 보면 도중에 덩저우와 먀오다오(猫島) 군도에 머물면서 「봉래각」에도 오르고 「천비궁」도 참배한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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