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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색 덜한 일본영화는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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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색 덜한 일본영화는 뜬다

입력
2000.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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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가 심상찮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성적표를 보자. 6편에 총관객 90여만명(이하 서울 기준).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지 일년 반 동안 일본 영화가 거둔 실적이다. 출발은 기대 이하였다. 첫 작품 「하나비」에 3만 7,000명이 들었고 「가케무샤」는 5만 8,000명, 「우나기」 3만 5,000명, 「나라야마 부시코」는 3만 8,000명이었다.그러나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 레터」에 와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불법 복제비디오로 수십만명이 봤는데도 서울에서 70만명을 기록했다. 이만하면 웬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훨씬 능가하는 대성공이다. 「러브 레터」의 성공은 일본의 신세대적 멜로 영화가 기존 한국 시장에 강세를 보였던 「첨밀밀」 「유리의 성」 같은 홍콩 멜로 드라마 못지 않은 시장을 확보하리란 예감을 갖게 한다. 같은 기타노 다케시(北野武)작품이고, 「하나비」보다 흥행에 뒤졌지만 「소나티네」가 서울에서만 상영해 2만여명을 기록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특정 감독에 고정팬이 생겼다는 얘기다.

지나치게 대중적이어서 편차가 심한 홍콩 영화, 영화제에서만 열광하는 극소수 마니아를 제외하면 고정 관객층이 완전히 무너진 유럽 예술 영화와 비교하면 안정된 관객을 확보한 셈이다. 그들 대부분이 유행에 민감한 젊은층이 아닌 중·장년층이란 점도 유리하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경우 관객의 60% 이상이 중·장년층이었다. 그들은 비교적 일본 문화에 친숙하고, 서사적 구조에 익숙해 비슷한 과거 유명 영화제 수상작이 수입돼 상영되면 다시 극장을 찾게 될 것이다. 한국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가 실패한 새로운 관객층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반면 젊은이들에게 어필하는 영화도 분명해졌다. 작지만 섬세하고 깔끔하고 예쁜 감성영화. 그러면서 일본의 전통이나 냄새가 강하지 않은 작품. 「러브 레터」의 성공 요인이었다. 정서적 이질감이 없으면서, 빠르고 자극이 강한 한국 영화에서 맛볼 수 없는 매력을 안겨주었다. 배우가 눈물을 흥건히 쏟아내 함께 울기를 강요하는 「편지」 같은 우리의 멜로물이나 관객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절묘하게 배치시켜 유치한 감정을 없애는 「유리의 성」 「성원」 같은 홍콩 멜로물과는 또 다른 색깔 때문에 일본 영화에 대한 호응은 당분간 이어지리란 전망이다.

이런 기대를 반영하듯 최근 국내 상영을 서두르는 작품들 역시 조용하고 가슴 아프고, 아름다우면서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설 연휴에 개봉하는 「철도원」(감독 후루하타 야스오)은 정년퇴임을 앞둔 한 철도원의 아픔과 상처를 하얀 눈처럼 그린 서정성 짙은 작품. 중·장년층을 울리며 일본에서 190만명을_국내에는 450만명으로 과장돼 알려졌다_동원한 대중영화이다. 2월 19일 개봉할 나카노 히로유키(中野裕之) 감독의 「사무라이 픽션」은 유려하고 비장한 「가케무샤」와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작품이다. 사무라이를 소재로 했지만, 마치 서부극과 황당한 코미디를 뒤섞은 감각의 뮤직 코미디다. 전편에 로큰롤을 깔고, 흑백 필름이면서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색만 부분 도입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연출하고 있다.

같이 개봉되는 히가시 요이치(東陽一) 감독의 또 하나의 일본 영화 「그림 속의 나의 마을」(96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은 대만의 「로빙화」나 중국의 「책상서랍 속의 동화」와는 또 다른 맛을 주는, 귀엽고 깜찍한 어린 시절의 동화다. 전후 일본 작은 농촌에서 자란 쌍둥이 형제의 모습을 목가적인 풍경 속에 담았다. 이 영화 역시 마치 우리의 60년대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일본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지난해말 실시된 2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조치. 허용 범위를 넓힘으로써 과거 예술 작품만이 아닌 비교적 최근 대중영화들의 수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처음 금기 해제에 따른 호기심을 기대한 작품들의 흥행실패도 거울이 됐다. 따라서 앞으로는 관객들의 기호에 맞춘 영화들의 상영이 늘어나고, 자연히 국내 시장 점유율도 높아질 것이란 분석이다.

벌써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에 대한 논의가 있고, 그에 따라 극영화의 수입제한 조항(국제영화제 수상작)이 없어지면, 한국에서 일본 영화가 홍콩과 유럽을 밀어내고 3위 자리는 물론, 예상했던 시장점유율 15%도 훨씬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도 시간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대 시각도 있다. 일본 영화산업의 취약성 때문이다. 당분간 우수한 재고품 공급이 끝나면 더 이상 들여올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봉했거나 개봉할 일본 영화 중 최신작은 「철도원」(99년)과 「사무라이 픽션」(98년) 뿐이다. 일본에서 일년에 이런 화제작은 한 두편 정도 나올까말까 할 정도. 따라서 과거 명작과 최근 화제작을 공유할 수 있는 지금이 어쩌면 일본 영화로서는 한국 시장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시사회] 철도원-갓난 딸·아내 여윈 시골역장의 아픔

홋카이도의 흙은 검다. 그리고 끊임없이 눈이 내린다. 그리고 붉은 조끼를 입고 「테네시 왈츠」를 읊조리는 역장의 아내. 검은 흙과 흰 눈의 모노크롬(단색조) 배경에 펼쳐지는 한 간이역장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자식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갓난 딸과 아내를 일찍 떠나보낸 한 역장의 이야기는 더구나.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철도원」이 「러브 레터」의 신화를 깰 수 있을까. 밀리언셀러 작가 아사다 지로의 117회 「나오키」상 수상작인 단편 소설을 후루하타 야스오(66) 감독이 1999년 영화화했다.

시골마을 종착역 호로마이의 역장 사토 오토마츠.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17년 만에 임신을 한 아내는 빨간 조끼를 입고 그에게 달려왔다. 언제나 풍경처럼 서있던 그녀가 떼를 쓰듯 포옹해 달라고 한 것은 처음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도 역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의 아이」라는 뜻의 유키코가 생후 두 달 만에 급성 열병에 걸려 열차를 타고 병원으로 떠날 때, 그리고 아이의 시신을 안고 아내가 돌아왔을 때, 그리고 17년 후 병약했던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언제나 역사에 서 있었다. 그 비극을 맞이하는 말은 「후부 OK, 신호 OK」. 붉은 신호 깃발을 든 역장은 언제나 슬픔을 그런 말로 덮었다.

기차와 마찬가지로 인생에는 종착역이 있다. 정년 퇴임을 앞둔 새해 아침, 눈 쌓인 플랫폼에 다가온 소녀. 인형을 두고 간 어린 소녀의 언니가 찾아오고, 다음날 아침 또 다른 언니가 찾아온다. 모두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아내가 입었던 빨간 조끼를 입고 밥을 차려주는 소녀에게 오토는 말한다. 『왜 말을 하지 않았니』 『아빠가 놀라실까봐요』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보고 놀라겠니』 이승의 아버지를 찾아 저승에서 찾아온 소녀의 대화는 눈시울을 자극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다음날 죽음을 택한다.

임무에 충실한 한 노역장, 그리고 판타지 영화처럼 달콤한 아버지와 죽은 딸의 해후, 이런 대중적인 내러티브는 모노크롬의 배경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으로 태어났다. 한편에는 영화 202편에 출연한 일본의 국민배우 다카구라 켄(69)을, 또 다른 편엔 아이돌(우상) 스타 히로스에 료코(20·유키코 역)를 배치함으로써 감독은 세대를 아우르는 관객층을 유인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군국주의적」이란 비난이 따라 다닌다. 오토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딸이나 아내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폐쇄될 간이역의 운명과 함께 그는 역장으로서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것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그를 보고 찬탄해마지 않는 일본의 문화와 깊숙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에 깊은 여운 뒤에 야릇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는다. 2월 4일 개봉. 오락성★★★☆ 예술성 ★★★☆(한국일보 문화부 평가, ★5개 만점 ☆는 절반).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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