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혁명은 우리 생활영역에서 우유부단한 모든 것들의 퇴장을 명령하더니, 급기야는 「영웅」 개념마저 바꿔놓았다. 무릇 영웅이란 뛰어난 능력으로 세상을 구제하거나 남다른 자질로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말한다. 정치가로는 루즈벨트 처칠 케네디 드골 간디 같은 인물이 쉽게 떠오르고, 레닌 그람시 모택동 페론 카스트로 호메이니는 어쨌거나 혁명 영웅이었으며, 맥아더와 패튼은 전쟁영웅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영웅,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는 사상적 영웅이었다. 뭇 사람들은 그들이 발휘하는 카리스마에 열광하였으며 구세주나 예언자처럼 역사적 고난과 생활역경을 타파해주기를 바랬다. 지난 세기 영웅은 쉽게 모방하거나 함부로 범접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그런데 디지털혁명의 와중에 있는 이 시대에는 그런 류의 영웅이 더 이상 태어날 것 같지 않다. 영웅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블레어와 슈뢰더보다 빌 게이츠와 손정의가 더 귀하고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 이 시대의 정치가들은 전문성과 약간의 지도력을 겸비한 「테크노크라트」 정도로 보이는 반면, 정보혁명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생각의 경계를 과감하게 뛰어넘는 혁신자이자 상업적으로 성공한 경영의 귀재로 받들어진다. 당연한 시대적 귀결일 것이다.
그래서 「상업화」는 이 시대 영웅의 제1 조건이 된 듯한 느낌이다. 아이디어 하나로 일류기업을 일군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주식시장에서 3.000만원으로 수억, 수십억을 벌어들인 사람의 성공 스토리가 신문을 장식한다. 하루 3시간만 자고 주식연구에 매달렸다는 중졸학력의 인물이 대기업 사원들을 자극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벤처창업으로 일약 거부가 될 꿈을 꾸게끔 되었다.
생각을 간단히 뒤집거나 남보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돈이 된다는 사실은 정보통신혁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이다. 그것이 기업경쟁력을 높여 궁극적으로는 경제발전의 견인차 노릇을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런데 생각뒤집기와 기존 사고방식의 허찌르기를 통하여 거부로 변신한 이 시대의 영웅들을 볼 때마다 순수한 존경심은 뒷전이고 「한발 놓쳤다」는 아쉬움과 「나는 뭐했나」라는 열등감이 앞서는 것도 흥미있는 현상이다.
korea.com이나 business.com같은 도메인이 수백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에 한동안 심기가 불편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는 것을 그에게 빼앗겼다는 부질없는 생각 때문이다.
과거의 영웅은 모방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영웅은 카피의 대상이자 시기심을 유발한다. 하루에도 수십명씩 태어나는 그들이 모두 돈과 직결되어 있는 탓이다. 인류사회의 공공선, 사회적 유대, 도덕과 윤리 등과 같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관은 상업화와 연결되지 않으면 사장될 위험에 처한다. 지난 시대의 영웅이 「이념」에서 태어났다면, 이 시대의 영웅은 「시장」에서 태어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세상이 정보통신혁명으로 시끌벅적하고 사회의 모든 영역이 변화의 물결에 요동치고 있다. 정부가 초고속통신망 완료 시점을 앞당기고 인터넷 사용자가 벌써 천만명을 돌파한 것을 보면 한국만큼 정보통신혁명에 모든 역량을 쏟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아직 한국의 정보통신 경쟁력은 선진국에 비하여 낮은 수준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가속이 붙은 이 시점에서 한번쯤 생각해볼 것들이 있다. 지난 시대의 압축성장 때문에 짓밟힌 가치관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큰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가. 정보통신과 시장을 잘 활용하면 돈이 되고 이것을 능란하게 해내는 벤처정신의 마술사들이 이 시대의 영웅이 되는 정보화 열풍에 말라 죽어가는, 그리하여 나중에 애타게 찾게 될 잊혀진 영웅은 없는지를 찬찬히 짚어볼 일이다./송호근 서울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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