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바둑 TV를 시청하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다. 한 아마추어 바둑대회 중계 방송이었는데 흑이 서너집 우세한 가운데 바둑이 거의 다 끝나가는 상황.갑자기 흑이 깜빡 실수로 일종의 자충수를 두었다. 다음에 백이 흑돌을 따내면 형세 역전이다. 순간 흑번 대국자가 엉겁결에 반상에 놓였던 돌을 도로 들어 내서 다른 곳에 두려다
「대국 중 물러서는 안 된다」는 바둑룰을 생각해 내고는 다시 원위치에 복귀시키면서 바둑이 끝났다. 당시 자막에는 백불계승이라고 나왔는데 해설자는 백의 반칙승이라고 설명했다.
어느 경우든 어차피 흑이 진 것은 변함없지만 그래도 어느 쪽이 맞는지 궁금해서 한국기원 바둑룰을 뒤져 봤더니 제21조 반칙 조항에 「한번 둔 착수를 들어내 다른 곳에 두는 행위」 는 반칙이라고 규정하면서 「단 바둑돌에서 손에서 떨어지지 않은 경우와 실수로 돌이 떨어진 경우는 착수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일단 착수했던 돌을 들어낸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 손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원위치로 복귀했으므로 명백하게 다른 곳에 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반칙패가 아니라 불계패일 것이다. 한데 불계패라면 흑이 마지막 착수를 한 시점에서 바둑이 끝난 것은 약간 이상하다.
흑이 일단 착수를 마친 상황이므로 다음에 백이 한 수를 더 두어 흑돌을 잡은 다음 흑이 둘 차례 때 불계패를 선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번 경우에는 자충으로 몰린 흑돌이 잡히면 백의 필승지세가 되므로 별 문제가 없었지만 만일 흑돌이 잡히더라도 계속 형세가 흑에게 유리했다면 백이 흑돌을 따내더라도 흑이 대국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또 대국이 TV로 중계됐기 때문에 당시 상황이 낱낱이 공개되었지만 만일 두 대국자끼리만 대국을 하다가 이런 일이 발생해서 두 대국자 간에 『물렀네』『물르지 않았네』하고 분쟁이 생겼다면 어떻게 처리되는 것일까.
실제로 수년전 프로기사들의 대국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서 결국 양자패, 즉 두 대국자 모두 패배라는 희한한 판정이 내려진 적이 있다.
당시 두 대국자의 주장이 워낙 완강하고 목격자도 없었기 때문에 두 대국자 모두에게 불이익을 준 것이다.
10여년 전에는 한 프로기사가 TV로 대국이 방영되는 가운데 한 수 물르려했다가 프로기사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6개월 대국 정지라는 중징계를 당한 적도 있다.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착수한 다음 분명히 돌에서 손이 떨어졌다가 다시 들어 옮겼는데도 상대방의 관용으로 그냥 넘어 가는 일도 종종 있다.
하지만 만일 이때 입회인이나 관전자가 발견하고 지적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현재 한국기원에는 이같이 「한가한」 질문에 대해 책임있는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다. 만일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때 가서 심사위원회의 판정에 따를 뿐이다.
한데 그 심사위원회라는 것이 정원은 몇 명이며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인지 또한 바둑규칙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구경꾼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바둑평론가=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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