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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거목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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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거목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입력
2000.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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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경리(76)와 시인 신경림(65). 거목(巨木)이라는 비유가 조금도 넘치지 않는 우리 문학의 큰 어른들이다. 박씨가 최근까지 소설을 쓰는 틈틈이 발표한 시들을 모두 한곳에 모은 시집 「우리들의 시간」(나남출판 발행)이 발간됐다. 신씨는 유년시절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자전적 에세이집 「바람의 풍경」(문이당 발행)을 냈다. 삶을 생각하는 두 거목의 한층 속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자, 결코 식지 않는 노대가들의 문학에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귀감이 되는 기록이기도 하다."시는 작업이기보다 그냥 태어난다는 느낌"

「우리들의 시간」은 실질적인 박경리씨의 시 전집. 그는 소설 쓰는 일이라는 것은 『삶의 기억들을 토막내거나 혹은 녹여서 몽롱한 허구의 몸통에다 배분하고 첨가하고 상상의 실마리로 삼으며, 때론 확신하면서도 절망적인 작업』이라며 고통스러운 과정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난 시는 다르다. 『시는 창조적 작업이기보다 그냥 태어난다는 느낌이다. 바람을 질러서 풀숲을 헤치고 생명의 입김과 향기와 서러운 사연이 내게로 와서 뭔가가 되어지는 것만 같았다』

박씨의 시편들은 이 말처럼 한 생명이 우주에 몸을 드러내듯, 분출되는 순간순간의 삶의 진실을 꾸밈이나 과장없이 보여주고 있다. 「토인비의 역사연구를 읽다가/재봉틀 앞에 바느질을 하다가/묵은 유행가책 꺼내어/노래를 불러 본다」(「지샌 밤」부분). 「무한한 것은 저만큼 서 있었고, 생활은 내 곁에 어질러져 있었고…창백한 형광등, 커피는 식어있」는데, 소설가가 「원고지는 난무하」는 작업의 와중에 느닷없이 묵은 유행가를 불러 제끼는 것이다. 그는 시를 통해 소설을 쓰는 스스로를 「눈먼 말」에 비겨 말했다. 「글기둥 하나 잡고/내 반평생/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영광이라고도 하고/사명이라고도 했지만/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스치고 부딪치고/아프기만 했지/그래,/글기둥 하나 붙잡고/여까지 왔네」(「눈먼 말」부분).

박씨의 시편들은 이렇게 소설 쓰는 자신의 외로운 작업, 일상의 풍경들과 함께 최근 작가가 집중하고 있는 생명사상에 바탕한 문명비판을 솔직하고 소박한 언어로 보여준다. 「土地(토지)」라는 제목의 시는 대작 「토지」에 빗대어 역설적으로 메마른 우리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土地’를 초라하다 했다//맞는 말씀이다//‘土地’는/매우 화려했지만/작가가 초라했다//산지사방/휴매니즘이란 것을/구걸해 보았으나/참으로 귀한 것이어서/좀체 얻을 수 없었다/역시 ‘土地’는 초라했다」. 구걸해도 찾기 힘든 휴머니즘을 찾아 「토지」를 완성한 작가의 푸념일까. 어쨌든 박씨는 『인간의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일제시대에는 몰래 시를 쓰는 것이 유일한 자유의 공간이었고, 6·25 고난의 세월 속에서는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며 『바라건대 눈 감는 그날까지 시심(詩心)이 내 생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원하며 오늘 황폐해진 이 땅에서도 진실하게 살 수 있는 시심의 싹이 돋아나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길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한다"

「바람의 풍경」은 신경림 시인이 살아온 길에 대한 기록이다. 『네 애비를 닮지 말아라』 겨우 면서기로 만족하여 매일 술에 절어 사는 아들에 대한 불만을 손주 신경림에게 이런 말로 표출했던 할아버지. 이 말을 들으며 자랐던 시인은 최근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서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 아버지의 모습과 다름없이 초라한 것을 발견한다고 털어놓았었다. 그 초라함은 단지 한 개인의 생의 비루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신씨 세대가 살아왔던 그 세월이 초라해서일까. 신씨의 에세이들은 바로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삶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한 시대를 되돌아보게 한다.

학병에 끌려가는 젊은이들에게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 돌아오라고 역전에서 만세를 부르던 유년시절, 피난길 양담배장사를 나섰다가 밑천을 다 들어먹고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가 됐던 소년, 자취하던 한약방집 딸과 봄밤의 사과꽃길을 말없이 걷던 사춘기, 참고서 값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사들고 개선장군처럼 신바람나게 돌아오던 문학소년 시절, 세상에 내가 할 일이란 없을 것 같다는 절망 속에서 시골 대폿집을 전전하던 암울했던 젊은 시절, 홍은동 산비알에서 김관식, 천상병 시인과 소주를 김치 안주해 마시던 문학도, 70년대 유신의 사슬 아래서 연행과 훈방을 되풀이했던 민중시인. 신씨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특유의 소박하고도 진솔한 글쓰기로 되돌아보고 있다.

『문득 고향 생각이 나서 무작정 찾아간 일이 있다. 길가 숲 까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잊었던 일들, 잊었던 얼굴들을 생각해냈다. 길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한다는 평범한 사실에 생각이 미친 것도 그때였다. 이로부터 나는 일부러 안으로 났다고 여겨지는 길을 찾아 걸었다』 신씨는 이 「안으로 난 길」을 걸어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이번 에세이들을 쓴 것이다. 『문학이 자기존재의 전방위적인 확인이라고 할 때 시 외에 이 산문들도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 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너무도 빨리 변하는 시대에 잊혀져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옛 풍습들,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물들, 그리고 그에 얽힌 사람들과의 사연을 되새기게 하는 감동이 신씨의 글에는 살아있다. 세월은 변해도 사람과 삶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전언이 그의 글에는 숨쉬고 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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