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둥(遼東)반도 연안의 명(明)군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1622년 오윤겸(吳允謙)이 중국에 갈 때는 상주 병력은 없었고 때마침 명과 조선의 군사협력 때문에 조선에 파견된 감군(監軍) 양지원(梁之垣)의 예하부대가 임시로 주둔했다.1622년 초 랴오둥 지역에서 전면 철수한 명군의 재편성이 아직 조직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모문룡(毛文龍)은 같은 해 8월 랴오둥반도 끝의 군항(軍港) 뤼순(旅順)을 비롯한 연안 도서 삼산도(三山島), 광루다오(廣鹿島), 스청다오(石城島), 창산다오(長山島), 루다오(鹿島) 등에 병력과 군선(軍船)을 배치하여 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한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그래서인지 다음 해부터 이곳을 지난 조선 사행(使行)은 루다오에서 뤼순에 이르는 연안 일대에 주둔한 모문룡의 군대와 접촉했다.
뤼순은 섬이 아니고 랴오둥반도 끝의 중요한 군항으로 산둥(山東)반도와 랴오둥반도를 연결하는 전략 요충지이며 조선사절의 안전 항해를 위해 매우 필요한 기항지이다. 일찍이 청(淸)에 점령당해, 1622년의 오윤겸 사행은 키를 호선(弧線)으로 돌려 창산다오 남쪽 장즈다오(獐子島)를 우회하는 항로로 갔다. 1623년 6월의 이경전(李慶全) 사행은 뤼순 연안을 향해했으나 적성(敵性)지역이므로 상륙하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 7월 명군 장수 장반(張盤)이 뤼순을 수복한 다음, 같은 해 9월 조 즙(趙 즙) 사행은 기항(寄港)했고, 다음 해 이덕형(李德泂)·홍익한(洪翼漢) 사행도 기항했다. 뤼순의 수복은 조선사행의 항로 단축과 안전 항해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루다오에서 뤼순까지는 모문룡 총병관(總兵官)의 관구이고 뤼순 앞바다 버하이(渤海)해협의 도서군인 먀오다오(廟島)군도와 산둥반도 끝인 덩저우(登州) 일대는 심유용(沈有容) 총병관 관할이다. 라이벌 격인 두 군관구는 작전 관할권과 전공(戰功) 경쟁으로 자주 마찰을 빚었다.
홍익한은 8월 21일 다롄(大連)만 서쪽(지금의 다롄시) 항구에 정박했다가 한밤 중(22일 오전 1∼2시)에 정·부사 배가 떠난 것을 알고 긴급 출항해 하현(下弦)의 달빛 아래 버하이해협을 횡단했다.
버하이해협은 랴오둥반도 남단인 뤼순지구의 「라오톄산(老鐵山)곶」에서 산둥반도 북안 펑라이(蓬萊)곶까지 해협으로 너비 109㎞. 황해와 버하이의 경계선이다. 해협 북쪽에서 남쪽으로 베이황성다오(北隍城島, 2.5㎢), 퉈지다오( 타磯島,6.9㎢), 난창산다오(南長山島,12.75㎢), 먀오다오(廟島,1.3㎢) 등 30여 섬이 줄지어 있어 먀오다오 군도라 한다. 지금의 산둥성 창다오(長島)현이다. 당시 조선사절에게 버하이해협은 「마(魔)의 해협」이었다. 항로가 연안항해에서 처음 외양(外洋)으로 진입해 위험이 뒤따른 데다 선배 사절들 유 간(柳 澗), 박이서(朴彛敍), 정응두(鄭應斗) 등이 조류가 복잡한 라오톄산 물 목에서 줄줄이 조난당했기 때문이다.
홍익한의 배는 버하이해협을 가로질러 당시 먀오다오 군도의 주도(主島)인 먀오다오까지 절묘한 풍향으로 10시간 남짓 쾌속 주파했다. 홍익한이 처음 도착한 섬은 황성다오. 라오톄산에서 약 34㎞다. 수심이 버하이해협에서 가장 깊은 곳이며 최대 수심은 83㎙. 홍익한이 백여 자 줄로 수심을 쟀으나 줄이 모자랐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니다.
버하이해협을 지나 덩저우항을 바로 눈앞에 둔 먀오다오에 닿은 이덕형·홍익한 사행은 이제야 길고 험난한 뱃길이 끝난 것이다. 먀오다오의 해양수호신 사당 「천비궁」(天妃宮, 1122년 송나라 때 창건)에서 감사의 제사를 지냈다. 먀오다오의 「천비궁」과 덩저우 봉래각(蓬萊閣)의 「천비궁」은 북부 중국의 대표적인 해신(海神) 사당이다.
조선사절들은 항해의 안전을 위해 당시 풍속대로 자주 해신을 제사 지냈다. 안전한 내륙여행에 비해 바닷길은 험난하여 조난의 위험이 많아 신의 가호를 얻고자 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해신 신앙과 중국의 해신 신앙은 매우 달랐다. 조선의 해신은 바다를 의인화했거나 또는 용 신앙인데 비해 중국은 송나라 때부터 남쪽 푸젠(福建) 출신의 여자무당 「마조」(마祖, 일명 天妃)의 인격신(人格神) 신앙으로 크게 바뀌었다.
마조 신앙은 전 중국에 퍼져 바다의 유일신이 되었고 이웃나라에도 많이 파급되었으나 한국까지 전해졌다는 얘기는 아직 없었다. 한국의 전통 신앙과는 이질적인 중국의 마조 신앙이 유입한 흔적이 있다는 것은 문화인류학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17년 동안 조선사절이 해로로 중국을 내왕할 때 이경전, 조 집, 이덕형, 김상헌(金尙憲) 사행들이 먀오다오와 봉래각 등의 「천비궁」에서 제사 지낸 사례가 있다. 이신(異神)을 신앙했다는 것은 문화교류사상 중요한 일이다. 조선의 정통적인 유학 선비인 김상헌조차 출발지인 선사포에서 천비에 올리는 제문(祭文)을 썼고 창산다오에서 또 천비의 제문, 천비의 강신문(降神文) 「제천비영송곡(祭天妃迎送曲)」을 썼다는 것은 눈여겨 볼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해로시대가 끝나면서 마조 신앙도 막을 내린다. 지금 먀오다오 군도는 풍부한 해산물과 뛰어난 해식풍광(海蝕風光)으로 중국 굴지의 관광지로 떠올랐다. 창산다오와 펑라이항의 거리는 불과 13㎞. 하루에 10여 차례 유람선이 들락거린다. 조선사절도 참배한 「천비궁」은 이제 중국 굴지의 해양사 박물관 「창다오 항해박물관」으로 변신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천비궁」도 일부가 잘 보존되어 아직도 천비신앙의 남은 한자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연행도폭」의 네 번째 그림은 버하이해협을 횡단하는 조선 선단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린 조선시대 바다 그림의 으뜸이다. 세 번째 그림은 잘 이은 기와 지붕처럼 작은 물결무늬를 빗방형으로 차곡차곡 겹친 「첩문(疊紋)」으로 그려 연안항해의 정밀성(靜謐性)을 나타냈다.
하지만 해협 횡단의 그림은 물결을 가지런히 하지 않고 크고 작게 그리고 엇갈리게 그려 역류(逆流), 소용돌이 치는 거센 파도를 연출해 해협 횡단의 마지막 장정(長征)을 썩 잘 부각시켰다. 6척의 배가 북동풍을 받아 쌍돛대가 부러질 듯 휜 채로 역주(力走)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가는 붓끝으로 세밀화처럼 그려넣은 배 위의 사람, 선미(船尾) 돛대의 펄럭이는 기류(旗旒) 등 점경(點景) 또한 일품이다.
그림 전체의 구도, 즉 포경(布景) 솜씨도 뛰어나다. 항해를 강조하기 위해 바다로 거의 화면을 꽉 채우면서도 왼편 위쪽 구석으로 랴오둥반도를 포치(布置)해 사경(寫景)과 사의(寫意)의 묘를 함께 살렸다.
/박태근
명지대·LG연암문고 협찬
■ 서장관 홍익한의 일기
花浦先生 朝天 航海錄 중에서
8월 22일, 맑음. 사경(四更, 오전 1∼2시) 무렵 싸늘한 가을바람이 잠자리에 불어와서 병들어 지친 몸이 소스라쳐 깨어 일어났다. 밖을 보니 바다는 고요하고 이지러진 달은 동천에 걸려있다. 동서에 즐비한 배들은 잠자는 듯 고요하고 하늘에 가득한 맑은 공기는 가슴에 스며든다. 사공을 시켜 화각(畵角)을 불고 포를 쏘아 신호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어서 물어보니 상·부사(上·副使) 배는 이미 떠난 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뱃사람들은 분통 터져 서둘러 닻을 거두고 어기여차 한소리로 돛을 한껏 올려 날쌔게 항구를 빠져나와 드넓은 바다로 나아갔다. 뤼순(旅順)를 뒤로 돌리고 눈 깜짝할 사이 황성도(皇城島, 隍城島를 이름)에 닿았다.
햐얀 달은 서로 지고 동녘에는 붉은 해가 솟아 오른다. 날이 밝은 뒤 두루 살펴보니 다른 배들은 모두 뒤떨어져 있었다. 힘찬 바람과 빠른 물살에 배는 쏜살처럼 달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섬들을 숨가쁘게 앞지르고 뒤로 돌리느라 경치를 눈 여겨 볼 겨를조차 없었다. 광루다오(廣鹿島)를 지난 후부터는 바닷물이 붉고, 누렇고, 검푸르고 시퍼래진다.
뱃사람을 시켜 백여 자 쯤 되는 동아줄로 깊이를 쟀으나 끝이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 섬들은 칼처럼 뾰족하기도 하고 쇠기둥처럼 깎아 세운 듯하기도 하고 병풍처럼 주욱 둘러 있거나 대문처럼 서 있기도 해 괴상한 모양은 각양각색이었다. 정오에 진주문(珍珠門)으로 들어가 먀오다오(廟島) 앞 항구에 닿았다. 사공들은 『오랜 뱃 생화에서 오늘처럼 빠른 적은 없었다』고 입을 모아 치하했다.
■ 연행도란 무엇
관동대 박태근 객원교수가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서 발굴한 조선중기 기록화 「연행도폭(燕行圖幅)」은 1624년 조선 인조의 왕권 승인을 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홍익한(洪翼漢) 일행의 행적을 담은 국내 유일의 해로 연행(燕行) 화첩입니다.
낙장이나 파본 하나 없는 25장 그림은 평북 선사포항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조선 중기 회화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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