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인데 새옷 못해줘 미안하다"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5년, 이제 저는 돌아가실 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토록 빨리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저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부모님을 돕는 작은 역할을 하며 드러나지 않는 모습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흘렀나 싶어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어머니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사랑하며 가족들을 위하고 남편을 잘 내조하며 오순도순 사는 즐거움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갔던 봄은 제철이 되면 어김 없이 돌아오는데, 인생은 한번 가면 영원히 못 오는 것인가…』라는 혼자말 속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시던 아버지도 어머니와의 애뜻한 정, 어머니의 자상한 손길, 어머니의 말없는 미소를 못내 잊지못하면서 사셨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너무도 빨리, 너무도 생각지 않게 어머니와 헤어졌습니다. 짧은 이별을 위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다니…. 큰 슬픔 속에서 어머니를 보내야 했던 아버지는 차마 자식에게도 풀어버리지 못했던 그리움을 시와 일기를 통해 남몰래 혼자 삭이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두고 아버지에게 『여보』라고 부르지 못하고 항상 낮은 목소리로 『이거 보세요』 『어디 계세요』라고 하셨습니다. 그토록 아버지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존경하고 신뢰했던 어머니가 너무도 그리울 때면 아버지는 어머니의 영정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저희들을 키우며 가장 신경 쓰신 일 중의 하나는 행여 대통령의 자녀라는 특권의식이나 우월감을 갖지 않을까 하는 것이셨죠.
그래서 저희들은 남보다 좋은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가져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남동생은 항상 자가용이 아닌 시내버스나 전차로 통학을 했고, 저 역시 성심여중을 다니면서 전차로 통학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훨씬 엄한 분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일겁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 어머니는 제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당신이 입던 한복 중 꽃자주빛 한복을 손수 수선해서 주셨습니다. 점심식사 자리에서 『근혜의 수석 졸업이 너무도 기쁘고 가슴이 벅차서 밥이 안 넘어가는구나』하시며 기뻐하시던 어머니는 옷을 다듬으며 『새 옷도 안 해주고 이런 옷 입으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내핍과 소박을 강조하면서도 내심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어머니. 어차피 우리에게 청와대 생활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보호받는 생활도 한정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런 여건에서 『남들에게 부럽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라』며 평범하게 길러준 어머니의 뜻이 귀하고 소중하기만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에 우리가족이 진해 앞 바다에서 마지막 여름휴가를 보낼 때가 생각납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낚시를 나갔을 때, 낚싯대에 걸린 비단고기를 보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불쌍하니 도로 살려보내 달라고 부탁하셨죠.
이 말에 아버지가 『그러면 도로 살려 보내지』하고 바다에 놓아주자 옆에 있던 남동생은 『한쪽에서는 잡고, 한쪽에서는 놓아주고, 어머니 아버지 하시는 일이 마치 수수께끼 같아요』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여름휴가는 오붓하고 단란한 가정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각별한 기회였습니다.
아버지도 이 때만은 고된 격무에서 해방되어 가족들과 종일 지낼 수 있었고, 어머니도 바쁜 일정에서 벗어나 주부로서의 생활에만 몰두하였고, 우리들도 하루종일 부모님 곁에서 생활하며 자연을 맘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생명체를 귀히 여길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1972년 봄, 어머니와 함께 아침 안개가 자욱한 청와대 산책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안개 속의 나무들이 촉촉하게 생기가 감도는 가운데 산비탈 쪽으로 걷던 어머니가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길에 떨어진 미나리 한 줄기를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셨습니다.
그 미나리는 이미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있었는데 어머니는 저에게 한 번 보이더니 버리지 않고 개울 옆에 조심스럽게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산책을 할 때마다 그 미나리를 살피며 살아나는지 어떤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 얼마 후 개울가의 그 미나리가 새파랗게 싹을 틔우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였습니다. 『얘, 근혜야, 미나리가 살았지?』
대통령 부인의 역할이 끝나면 양지바른 시골에서 조용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 하던 어머니는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마음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산 분이었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그렇듯, 저의 부모님 역시 자식들이 효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은 채 너무도 일찍 저의 곁을 떠났습니다.
저를 멀리 떠나보낼 때마다 꼭 손을 쥐어 주던 어머니의 모습, 저는 어머니의 그 모습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일, 그런 일들만 하고 살면 이 세상을 잘못 살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어머니가 제게 남긴 가장 큰 유산입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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