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박목월 시인의 「나그네」중)명절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마을마다 술이 익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설을 앞둔 이맘때면 정성들여 빚은 술을 이웃과 나누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 우리네 세시풍속. 고급스런 서양술에 자리를 뺏기긴 했지만, 조상들이 즐겨 마시던 토속주엔 삶의 지혜와 멋, 기품이 담겨 있다.
전통주 제조업체인 「배상면 주가」의 배영호 사장은 『우리 전통술은 쌀과 누룩을 기본으로 계절마다 제철 재료를 섞어 빚는 것이 특징』이라며 『서양술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알칼리성이라 뒤끝이 깨끗하고 건강에 좋으며, 그윽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풍미가 매력』이라고 말한다. 올 설에는 「백약(百藥)의 으뜸」으로 불릴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던 전통주로 옛 정취를 살려보면 어떨까.
전통주 어떤 종류가 있나 맥주나 위스키 같은 서양의 곡주가 술의 발효를 위해 맥아(麥芽·엿기름)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우리 전통술은 누룩을 쓰는 것이 가장 큰 특징. 누룩 중에서도 생밀을 껍질째 갈아 반죽한 뒤 곰팡이를 피워 만든 「막누룩」을 주로 쓰는데 이는 쌀로 만든 일본 누룩 「입국(粒麴)」과도 구별된다.
전통주를 제조방법에 따라 분류하면 쌀과 누룩을 발효시킨 술밑(酒母)을 맑게 여과한 것을 약주(혹은 청주)라 하고 술밑을 증류한 것을 소주, 약주를 거르고 난 찌꺼기에 물을 섞어 거른 것을 탁주라고 부른다. 각각의 술들은 다시 부원료로 어떤 것을 배합하느냐에 따라 백하주, 흑미주, 산사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요즘엔 가까운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의 주류 코너에 나가면 갖가지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전통 민속주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생쌀 빚기」라는 독특한 발효법을 사용하는 배상면주가에서는 찹쌀로 빚은 백하주, 붉은 누룩(홍국)을 사용한 천대홍주, 흑미를 발효시킨 흑미주 등의 전통약주를 시판중이다.
지역별로는 인삼에 통밀과 솔잎 등을 섞어 발효한 뒤 증류한 금산인삼주, 누룩에 찹쌀로 찐 술밥을 섞어 숙성시킨 김천 과하주, 지리산의 서리맞은 야생국화로 빚은 함양 국화주, 배와 생강을 넣어 만드는 전주 이강주 등이 유명하다.
이밖에 진달래꽃을 넣어 빚은 당진 면천의 두견주, 산딸기(복분자)의 과즙을 배양한 뒤 누룩을 섞어 숙성시킨 고창 복분자주, 율무를 증류시킨 용인 옥로주 등도 전통이 깊은 민속주이다.
전통주 제대로 음미하기 우리 전통약주는 서양의 와인처럼 색깔과 맛, 향을 함께 음미하는 술. 우선 빛깔을 자세히 살펴본다. 부재료에 따라 색깔이 좌우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황금색을 띠는 술이 많은데 엷은 호박빛에서 짙은 담갈색까지 농도가 다양하다. 흔히 색이 엷을수록 담백하며, 진할수록 맛도 진하고 오래된 술로 보면 된다.
전통주의 또 다른 특징은 구수한 누룩향 외에도 전혀 과일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사과나 수박같은 과일향이 난다는 것. 누룩의 밀기울 성분이 발효되어 생성하는 향기로 향이 강할수록 진한 맛이 난다. 전통주는 섭씨 8도로 차게해서 먹는 것이 보통인데 담백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 차게, 다소 무거운 맛과 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덜 차게 마신다.
전문가들은 전통주에 단 맛, 신 맛, 떫은 맛, 구수한 맛, 쓴 맛, 매운 맛 등 6가지 맛이 녹아 있다고 한다. 이 맛들이 두드러지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좋은 술이라는 것. 이와 함께 잘 고른 전통주는 오리병이나 자라병, 편병, 사발 등 옛 그릇에 따라 마시면 훨씬 운치가 넘친다. 전통주의 응용 전통주는 칵테일로도 안성맞춤. 서양 칵테일은 무미의 술에 다른 재료를 넣어 새로운 맛을 내지만 전통주 칵테일은 원료 술의 향과 맛을 증폭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배상면주가는 백화주와 유자, 흑미주와 홍차, 천대홍주와 오렌지즙, 흑미주와 포도즙 또는 체리즙으로 다양한 칵테일을 만들어볼 것을 제안한다.
전통주 제조에 쓰인 누룩이나 술지게미(혹은 막걸리)는 새콤한 술음식을 만드는데 활용할만하다. 술음식은 전통주의 안주용으로 제격. 소금에 절인 무를 술지게미에 묻어 발효시킨 술지게미 무박이, 생어징어를 묻어 발효시킨 술지게미 오징어박이, 술빵과 술과자 등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누룩은 전통주 제조업체나 서울의 경동시장, 성남의 모란시장 등 재래시장의 제수용품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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