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의 방한문제가 논란이 됐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정신적·정치적 최고 지도자인 라마교 교주(敎主)를 일컫는 칭호이지만, 통상 1959년 인도로 망명한 13대 달라이 라마(65)를 지칭한다. 티베트의 신왕(神王)이었던 그는 용맹한 산악부족인 근위기병들이 중국군의 무장해제 요구에 맞서 봉기했다가 진압되는 상황에서 시종차림으로 변복한채 수도 라사를 탈출, 말을 타고 히말라야를 넘어 망명해 세계적 뉴스의 초점이 됐었다.■40년이 흐른 지난해 뉴스위크지는 그의 망명에 얽힌 미국의 티베트 비밀공작 전모를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보도했다. 미국 CIA는 1956년부터 티베트인 수백명을 콜로라도로 데려가 훈련시킨 뒤 파키스탄과 네팔을 통해 투입, 무력투쟁을 지휘하는 한편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유도했다. 이어 60년대 중반까지 네팔에 게릴라 2,000명을 유지, 중국군 기습과 첩보수집 등에 연간 170만달러를 썼다. 달라이 라마도 해마다 18만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공작목표는 중국변방 교란과 냉전 선전전에 국한됐다. 근대주권국가군에 오르지 못한 티베트의 독립을 지원하려는 헛된 계획은 없었다. 이에 따라 달라이 라마도 『미국의 망명유혹에 환상을 가졌었다』며 74년 티베트 전사들에게 무력포기를 교시했으나, 이들은 끝내 저항하다 네팔군에 전멸됐다. 이런 비극적 배경은 가려진채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가 오랫동안 세계언론의 단골메뉴에 오른 것은 냉전이 낳은 아이러니의 하나다.
■반공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도덕적 상징성은 세월과 함께 퇴색했다. 서유럽에서는 요즘도 대학생들이 티베트 독립지지 시위를 하지만, 사소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각국 정부는 그의 입국을 허용하고 예우하는데 여전히 중국과의 관계에 신경쓴다. 특별한 명분이나 소득 없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서울대 학생들이 그를 초청한 것은 그렇다 치고, 정부나 언론이 공허한 명분을 내세워 논란할 일은 아니다. /강병태 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