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진료실에서] 노약자와 의약분업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진료실에서] 노약자와 의약분업

입력
2000.01.19 00:00
0 0

요즘 독감 환자들이 크게 늘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할머니 한 분은 다행히 지난 해 예방주사를 맞은 덕분에 독감이 비켜가서 평소 앓던 기관지 천식이 악화하지 않고 있다. 할머니는 매 번 주스나 드링크 몇 병을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와 내 손에 쥐어 준다.『약값 보다 돈이 더 많이 드실 것』이라고 말려도, 막무가내로 비닐봉지를 내민다. 손가락 마디가 유난히 굵은 그 할머니의 손에 들린 검정 비닐봉지를 나는 여직껏 거절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어쩌다 감기에 걸려 숨이 차고 기침이 심해 예약 날짜보다 일찍 병원에 올 때면 마치 자기가 무엇을 잘못해 증상이 나빠진듯 내게 미안해 하고, 약을 투여해 증상이 호전되면 내가 치료를 잘해 준 덕분이라며 좋아 한다.

내 손에 들려 주는 검정 비닐봉지 속의 주스나 드링크에는 할머니의 마음과 정성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할머니가 자신을 정성껏 돌봐 달라는 촌지의 의미로 준 것인지, 성의껏 치료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지는 따져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를 믿고 찾아오는 할머니가 항상 고맙게 느껴진다.

할머니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의약분업이 된다면서요』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7월부터 의약분업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의사가 진찰을 하고 처방을 써 주면 병원 밖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사 먹어야 하는 것이다.

환자들이 병원에서 약을 타기 위해 장시간 대기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의사가 『한 달치 약을 처방받았는데 사흘치가 모자란다』는 불평을 들을 필요도 없게 된다.

할머니의 경우 숨찬 증상이 악화하면 흡입제나 기관지 확장제를 써 보고, 정맥주사도 놓고 하면서 천식의 경과를 살피게 된다. 하지만 이젠 약국에서 주사약을 사오라고 해야 한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 빙판길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쩔까 몹시 걱정이 된다. 차라리 입원 치료를 하는 것이 환자에게 이로울 지도 모른다. 입원실이 없는 동네의원은 더욱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갑자기 시행되는 의약분업이 환자-의사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충분한 연구가 돼있는지 궁금하다. 할머니같은 환자가 병원을 찾는 일이 더 고달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홍명호·고대구로병원 가정의학과 과장·객원편집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