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나이의 최희연 피아노 독주회주목해야 할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외국에서 활동하다 지난해 귀국해 14일 금호미술관에서 첫 독주회를 한 최희연(32·서울대 음대 교수)이다. 그는 지난해 서울대 교수 임용 오디션에서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선택됐다. 국내에는 낯선 얼굴이지만 실력은 이미 소문이 나서 이날 연주회에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등 많은 음악인이 찾아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작곡가 류재준씨가 리뷰를 보내왔다. 14일 금호미술관 금요음악회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최희연의 연주는 한국에도 이런 수준의 바흐 연주자가 있구나 하는 희열마저 느끼게했다. 연주자에게 가장 까다로운 음악이면서, 작곡가들에게 무한한 동경과 아이디어의 원천인 바흐가 이날 완벽하게 자신의 음악을 청중에게 과시하였다.
프랑스 모음곡 5번 G장조와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바흐의 건반음악 중에서도 백미에 속한다. 어설픈 연주로는 이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정신적인 깊이를 끄집어내기는 불가능하다. 절정에 다다른 연주기술과 뛰어난 작품 분석력, 대위법에 대한 완벽한 이해,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대가라고 불리는 몇몇의 특별한 천재들만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무엇인가를 어렵고 조심스럽게 보여주는 이 곡들을 32세의 피아니스트가 완벽하게 장악한 것이다.
골드베르크는 처음 테마에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섬광같은 논리적 분석을 보여주어야 한다. 최희연은 처음의 한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대위법적인 음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고 투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는 각각의 변주곡을 새로운 이미지와 함께 풀어 나갔다. 각 변주곡 사이의 빈 연결 부분에서조차 완벽하게 계산된 조형력을 보여줬다. 그의 연주기량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도 최정상급이다.
바흐를 연주하는 데는 영롱하다느니 아름답다느니 하는 형용사적 연주기법은 필요 없다. 단지 각인을 찍는 듯한 에너지와 이 사이를 유영하듯이 움직이는 대선율만이 존재할 뿐이다. 주제선이 뼈라면 그 사이를 흐르는 음들은 살과 피다. 이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연주는 이미 바흐의 작품을 생동하는 유기체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최희연의 출중한 연주기량은 이것이 가능하게 했다. 작품의 본질을 읽는 밝은 눈과 엄청난 고된 수련이 없으면 불가능한 결과다. 아마도 글렌 굴드의 저 유명한 연주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압도적인 명연에 가려져서 그렇지 프랑스 모음곡 역시 만만한 작품이 아니다. 7개의 춤곡으로 이루어진 이 모음곡은 각각의 개성이 명확하게 살아나야 한다. 골드베르크가 큰 강물이라면 프랑스 모음곡은 개성강한 재료로 만든 건축물이다.
하프시코드를 위해서 작곡된 대부분의 바흐의 건반음악은 악기의 특성상 미세한 음색 변화와 셈여림이 없다. 그러나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미세한 음향의 변화는 대위법의 선적인 독립성을 더욱 보장해 주기도 하지만 유치한 감정이입으로 연주를 망칠 수도 있다. 이 기묘한 부조화를 최희연은 잘 빠져나간다.
피아노를 잘 알고 있는 연주자라는 것은 피아노의 음색을 어떻게 바흐의 원곡에 잘 융합시키는가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희연의 포르테는 밋밋하지 않다. 건반 터치가 좋은 몇몇 피아니스트가 가지고 있는, 피아노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음향이 쏟아진다. 음량이 작은 부분에서도 적어도 10개 이상의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해머와 건반, 스트링으로 만들어진 악기에서 저렇듯 다채로운 소리가 날 수 있을까.
모음곡의 마지막 곡인 지그는 대단히 빠른 템포가 아니면 실처럼 엮어나가는 바흐의 대위법적 묘미를 잘 알기 힘들다. 최희연이 이날 연주했던 지그는 아마도 그 한계치에 근접했을 것이다.
이번 연주회는 그가 작년 10월 서울시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협연하여 절정의 기량을 선보인 후 한국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 리사이틀이다. 부담감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이러한 연주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적지않은 해외 연주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미 부조니, 비요티, 에피날, 카펠 등 국제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독일 미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성공적인 연주활동을 했다는 것을 보면 왜 이때까지 그녀의 이름을 듣지 못했나 의아스럽다. 이처럼 훌륭한 예술가가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고무적이다. 이런 진지한 연주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21세기를 여는 시점에서 분명 행운이다.
/류재준·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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