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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문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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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문익환 목사

입력
2000.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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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근씨가 전하는 '늦봄' 문익환목사나의 가족이야기… 문호근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

1989년 2월 어느 날이었다. 저녁 인사를 드리러 아버지께 올라갔다.

『잠깐 앉거라』

어머니는 자리를 비켜 주셨다.

『내가 이번에 평양에 가게 되었다. 네가 수행해 주겠니?』

『예』

『그러면 여권 수속을 하여라』

어머니는 쟁반에 포도주를 담아 들고 들어오셨다.

『부자간에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지요?』

나는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역사적인 방북에 동행해 드릴 뻔 했는데, 여권 수속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안기부 수사관은 이 대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였다. 거기가 어딘데, 아무리 아버님이 권했다고 해서 두말없이 『네』하는 대답이 나오느냐는 거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대답이 나왔을까. 질문을 받은 뒤에야 나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론은 이런 거였다. 아버지도 여러가지로 생각해보신 후에 그런 제안을 하신 것이니 나는 그저 따르면 되는 거였다고….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초등학생 때였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는 매우 노하셔서 매를 드셨다. 나는 맞기를 거부하였다.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아버지는 매를 들고 쫓아나오셨다. 나는 그냥 집 밖으로 뛰어 달아났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그건 내가 책임지면 되는 것인데 왜 매를 맞아야 하나, 그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중학생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공부를 하고 계셨다.

『저,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겠어요』

『왜?』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요』

아버지가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분의 심각한 표정외에는….

그 후부터 아버지는 나의 판단에 개입하지 않으셨다. 내가 음악대학에 진학하겠다고 갑자기 선언했을 때도, 내가 대학 연극반을 반들어 허구헌 날 친구들을 집으로 끌어들여 작품 토론이라는 명목으로 밤새 떠들어도….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걱정이 되셨을까?

아버지가 안양교도소에 계실 때였다. 재판정에서 막내 동생 성근이가 판사의 공판 진행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 「법정 모독」이 되어 부자가 함께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일이 있었다. 아버지 건강이 염려됐던 성근이는 운동 시간에 갑자기 담을 넘어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한다. 성근이가 그 때 본 것은 한 노인이 좁은 감방에 사색이 되어 죽은 듯 누워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면회 때마다 언제나 밝게 웃으시며 우리들을 오히려 위로하시던 분, 사람들로부터 『문목사는 감옥 체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감옥 생활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던 모습과는 너무 딴 판인 광경에 성근이는 통곡했다던가….

나의 할아버지 문재린(1896∼1985) 목사는 북간도에서 목회 활동으로 유명하신 분이다. 원래 우리 집안은 북간도 명동(明東)이 삶의 터전이었지만 갑자기 근처의 용정(龍井)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해 집안 분들에게 차례로 물어보았는데, 아무도 명쾌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1920년대초 중국에 공산당이 세력을 얻으면서 명동을 접수해버렸다는 거였다. 그때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김약연 목사님이 『문재린 목사가 그때 있었다라면 허무하게 빼았기지는 않았을 텐데…』하며 안타까워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게 되었다. 문재린 할아버지는 당시 캐나다에 유학중이어서 명동에 없었던 것이다. 가슴 아픈 사연은 끝내 들려주지 않으시던 어른들, 그건 다 당신들이 견뎌내신 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스스로를 「늦봄」이라 부르셨다. 시인이 되신 것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드신 것하며, 모두 1950년대 중반이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자식들은 다 나름대로 자리잡은 이후였고, 그래서 별로 자식 걱정않고 운동할 수 있다고 다행스러워하셨다. 하지만 1970, 80년대 운동가의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 우리 4남매, 그리고 며느리들도 아버지 때문에 피해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걸 당신이라고 해서 모르셨을까? 그래도 그렇게 사실 수 밖에 없었고, 당신이 겪으신 시대의 아품을 당신은 지고 가신 것이다. 내일이면 떠나신지 여섯해가 된다. 우리 세대는 또 우리 세대의 문제를 지고 가면 되는 거겠지. /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

문호근은 누구 : 1946년 경북 김천 출생. 오페라 연출가.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 수학. 오페라 「파우스트」「효녀 심청」「백두산」등을 연출했고 1998년부터 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으로 있다.

19일 6주기 추모행사 가져

늦봄 문익환 목사 6주기 추모행사가 기일인 18일 오후6시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다. 「통일맞이 늦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이사장 이재정·성공회대 총장)」 주최로 열리는 이 행사는 임종석 전 전대협의장의 사회로 진행되며 노래패 꽃다지, 가수 김원중 안치환, 영화배우 추상미씨 등이 나와 시낭송과 추모 공연을 펼친다. 문목사는 1918년 북간도 출생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에 헌신했다. 1989년 3∼4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면담하고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 93년 3월 사면조치로 가석방됐다. 이듬해인 94년 1월18일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 부인 박용길 여사, 장남 호근, 3남 성근(영화배우)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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