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는 시대의 변화에 그럭저럭 잘 적응해가며 살아왔다고 믿고 있었다. 나를 스쳐간 변화의 물결에 전적으로 동의한 건 아니더라도 일시적인 낯가림에 불과했을뿐 결국은 길들여지는게 더 편했던 것은 그 변화가 꾸준히 곤궁에서 풍요로, 불편에서 편리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만약 점점 못살게 되고 점점 더 불편해졌다면 적응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생활양식이나 윤리도덕에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닥쳐도 결코 안놀랄 것처럼 믿었던 것은 무슨 근거가 있어서 생긴 자신감이라기 보다는 자기 정체성의 포기였는지도 모르겠다.밀레니엄 이브, 안방에 앉아서 세계 각국의 눈이 돌게 기발하고 화려한 새천년맞이 행사를 보면서 참 사람은 오래 살고 볼 거라고 신기해 하면서도 21세기를 적응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래온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괴로운 것이 되리라는 비관적인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엄청난 호들갑과 낭비는 이유를 따지기 전에 우선 비위에 거슬렸다. 그렇게 한번 덧난 비위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같은 게, 호경기란 이름으로 호들갑과 낭비는 더욱 기승을 부릴 기세이니 말이다.
일년 열두달 허구 헌 날 뜨는 해가 어느 날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못알아보고 살 무심한 도시인들이 별안간 신들린 듯이 일제히 이 산 저 산, 이 바다 저바다로 해맞이를 가고 금줄을 쳐서 보호해야할 진짜 새 것인 신생아에게까지 다만 새해 자시(子時)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서 만천하에 공개하는 호들갑을 무슨 수로 이해할 것이며,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많이 쓰고 잘 써야 못번 사람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쯤은 안다고 해도 오늘날의 주소비층은 주로 한 번도 돈을 벌어보지 않은 청소년층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또 돈벌이의 방법도 생산적이거나 창의적인 일로 자기가 속한 사회에 이익되게 버는 도덕적인 치부와, 사기나 횡령 등 부도덕한 돈벌이 중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근면과 절제를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우리같은 구닥다리들이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비위에 거슬린다는 건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왜 사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그러니까 기차게 소비하기 위해 산다는 것 이상의 정답이 없는 세상에 문학이 발붙일 곳 또한 점점 협소해지다 마침내 밀려나고 말 것같은 것도 새천년의 우울한 전망 중 하나였다. 자기가 몸 바쳐 종사하고 긍지를 느끼던 일이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다.
그러나 뜻밖에도 근래에 본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는 큰 위안이 되었다. 아아,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가 있구나. 실은 좋은 리얼리즘 영화의 전범같은 영화였는데도, 스토리는 없고 허황한 눈요기거리만 있는 영화에 길들여진 눈엔 착실한 줄거리가 있는 것까지도 신선하게 여겨졌다.
이야기라야 별 것도 아니다. 평범하다 못해 누추한 한 인간이 시간의 더께를 한겹 두겹 벗고 순수한 알몸으로 돌아가는 개인사다. 그러나 그의 개인사에는 더러운 우리의 근세사가 맞물려 있다. 그것을 견디고 살아낸 그는 비천하고도 위대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살아내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보잘 것없는 개인도 집단적인 광기에서 끌어내면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고유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세계가 된다. 오래간만에 만난 슬프고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영화였다.
더욱 반가웠던 것은 문학이 기를 쓰고 있어야 할 까닭같은 것까지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잊으라 잊으라 하면 잊고, 앞만 보고 달리라면 달리면서 살아왔다. 가다 뒤돌아보는 것조차 우리를 그렇게 밀어붙인 얼굴없는 힘에 대한 거스름이었다. 거스르면 다친다. 그러나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좋은 꿈을 꿀 수 없다.
박완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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