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패션의 본산 프랑스에 유행은 없다. 스커트와 청바지, 쫄쫄이바지와 하이패션이 다양하게 동거하는 곳이 파리다. 파리지앵들은 남의 눈이고 유행이고 아랑곳하지 않는다. 각자의 분수와 체형에 맞게 개성미를 낸다. 사회시스템과 문화양식이 다 이런 식이다. 이같은 다양성이 때로는 상승작용, 때론 완충기능을 하면서 나라의 힘을 심어가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연중 3분의 1 이상을 놀면서도 세계 5~6위의 경제위상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요즘 국내 증시 투자자들이 미국 시황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증시의 세계 동조화 현상이라고 하나 한국은 특히 유별나다. 지난해의 경우 국내증시의 기복 전환점이 미국과 일치한 가운데 등락의 폭이 미국의 4배 이상이었다고 하니 미국의 재채기에 한국은 감기 걸린다는 말이 틀림없다. 유행성이 강한 한국적 집단신드롬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 같다.
■새 세기의 한국경제는 수백년만의 호기를 맞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굴뚝산업에서 지식산업,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경쟁무대가 바뀌는 덕분에 산업화의 후발주자인 한국이 선진국들과 동일선상에서 재출발할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변화에 민감하고 무엇이든 속전속결하는 민족기질이 속도와 순발력을 요하는 디지털 패러다임에 적합하다고 한다. 그러나 디지털시대 경쟁력의 뿌리가 무엇인지 따져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동통신 보급률 등 첨단에 대한 열기만 보면 국내에도 벌써 굴지의 인터넷기업이 한두개쯤 나왔어야 했다. 결국 관건은 매체가 아니라 지식·정보의 내용물(컨텐츠)과 그것을 창조하고 요리하는 인간에게 있다. 캔버스가 좋아서 피카소가 그림을 잘 그린 게 아니다. 개성과 창의력을 끌어올리는 밀도높은 문화·제도의 산물인 것이다. 나팔소리에 맞춘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휩쓸려 투자」, 전염병처럼 번지는 벤처사업 충동 열기, 빨리빨리가 대충대충으로 흐지부지되는 냄비성향 등 체질과 발상의 근본적 각성없이 미래는 없다.
/송태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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