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나는 아일랜드에서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 유럽에 있었지만 영국, 독일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사람이라고는 3명 밖에 없던 나라.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 학생운동으로 두번째 제적을 당한 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간 나라.내가 다니던 골웨이의과대학은 이 나라의 수도인 더블린의 반대쪽, 즉 대서양 바닷가의 골웨이에 있었다. 골웨이는 인구 4만명에 걸어서 30분이면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는, 정말 작은 도시였다. 내가 실습나가던 4층 건물의 병원에는 그 도시에 몇 안되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가끔 처음 타는 할머니들이 나같은 외국인에게도 도와달라고 할 정도였다.
어느날 저녁 무료로 배달되는, 지역신문과 생활정보지의 중간쯤 되는 신문에서 헌혈을 받는다는 광고를 보았다. 아일랜드의 호의로, 10년 가까이 중단했던 의학공부를 다시 한 나는 헌혈이라도 해 이 나라의 도움에 보답하기로 했다.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헌혈을 저녁시간에, 초등학교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직접 그 장소에 간 뒤 내가 본 광경은 정말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돼 지금도 그림처럼 선명하게 머리속에 떠오른다.
나는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헌혈을 하려고 나온 사람들이 긴 줄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0개 정도 놓인 침대는 헌혈자로 가득 찼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300여명이나 됐다. 온 가족이 함께 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헌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헌혈차 주변에서, 혹시 휘장을 두른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피해가는 우리나라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당혹감을 느꼈다.
그날 밤 본 광경은 조그만 도시 골웨이에서 1주일간 반복됐는데 그 모습에서 나는 시민사회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사실은 그래도 믿어지지 않아 인구가 골웨이의 절반 밖에 안되는 비리나스로우라는 곳에서 헌혈을 두 번이나 더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같은 모습을 보았다. 비리나스로우에서 헌혈한 뒤 두 자루의 연필과 함께 받은 헌혈증을 보면 지금도 그때의 감동과 함께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온다. 군인의 반강제적 헌혈로도 유지가 안돼 피를 수입하는 부끄러움을 새해에는 벗어 볼 수 없을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