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9)…이순원 중편소설 '은비령■이순원 연보
57년 강릉 출생, 강원대 경영학과 졸업
88년 단편 「낮달」(문학사상 신인상)로 등단
소설집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그대 정동진에 가면」등
장편 「수색, 그 물빛 무늬」로 동인문학상(96년), 중편 「은비령」으로 현대문학상 (97년) 수상
■이순원의 중편소설 '은비령' 줄거리
나는 지금 죽은 친구의 「바람꽃」 같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오래전 은비령에서 함께 고시공부를 하던 친구의 아내이다. 이제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던 날, 나는 문득 죽은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고, 약속 장소로 가던 길을 돌려 예전 우리(친구와 나)가 처음 만났던 은비령으로 향한다. 아직 그와 나 사이에 마음의 어떤 마지막 정리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남긴 메시지를 듣고 다음날 눈길을 헤치고 그녀도 은비령으로 온다.
거기서 우리는 혜성을 관찰하기 위해 그곳으로 온 한 사내를 만난다. 사내는 대부분의 행성이 일정한 공전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도 2,500만년을 주기로 똑같은 일들이 되풀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아픔도, 우리가 만나고 헤어짐의 인연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날 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나는 이번 생애가 길지 않듯, 앞으로 우리가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격정적인 사랑 속에 나는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에 왔다가 이제는 다시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가는 별을 가슴에 담는다. 2,500만년 후 우리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은비형은 상상공의 고개가 아니었다
남자는 그곳을 「은비령」이라고 불렀다. 그는 죽은 친구의 「바람꽃」같은 아내를 사랑했다. 그 사랑에는 무거운 짐이 얹혀졌다. 영원히 썩지 않은 그 마음의 소금 짐을 씻어내려 그는 길을 떠난다. 남자는 처음 친구가 죽은 바다를 생각했다. 그러다 친구와 둘이 함께 지냈던 「은비령」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소금 짐을 부려놓을 곳은 없었다. 눈 내리는 은자(隱者)의 깊은 땅, 「은비령」에서 그는 운명처럼 비껴 지나가는 바람꽃을 가슴에 더 묻었을 뿐이다. 여자는 자신의 곁에 왔다가 별처럼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똑같은 인연이 다시 찾아온다는 2,500만년 후를 위해 운명을 바꾸고 싶었지만, 여자는 그때에도 「바람꽃」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녹지않은 눈길, 은비령으로 가면서 작가 이순원씨는 『금기, 이탈, 인연, 그 인연의 안타까움』을 이야기했다. 소설 「은비령」을 가슴에 안고 떠나는 길에 이런 단어들이 눈이 돼, 바람이 돼 차창에 부딪친다. 그 바람과 눈을 맞으러 길을 떠나고, 그것을 맞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2,500만년이란 긴 시간을, 그 윤회 속에서 다시 만날 별 하나씩이 가슴에 담겨질 것이다.
한계령 정상에서 사람들은 멈춘다. 바다로 가는 이들은 그곳에서 비로소 일상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이탈을 시간을 보내고 동해를 떠나온 이들은 벗어놓은 그 짐을 다시 지고 삶 속으로 돌아온다. 그 길로 떠났다 돌아오는 사람들은 그 버림과 되찾음을 배반할 수 없듯이 중간에 다른 길로 가지 못한다. 은비령은 그것을 배반한다. 바다를, 이탈을 향해, 한계령을 넘어서자마자 곧바로 서쪽 방향인 필례약수로 되돌아 넘는 길. 은비령에는 이탈과 일상,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느낌 속에서 남자도, 「바람꽃」의 여자도 2,500만년의 시간을 느끼고, 비껴가는 운명을 잠시 머물게 하고는 떠난다.
겨울 필례약수로 가는 고갯길은 언제나 하얀 눈이 덮여있다. 가장 먼저 내린 눈이 가장 나중에 녹는다는 곳. 사람들은 한계령을 넘어서면 바다와 설악으로만 내달리고, 인제군 원통과 현리로 은비령 계곡을 드나드는 그곳 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한계령을 타고 세상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가 숨은(隱) 땅, 신비한(秘) 땅이란 이름을 붙인 곳. 여자가 베틀을 짜는 모습같아 필녀라고 했다, 지금은 필례로 불리는 「은비령」의 첫 쉼터인 필례약수터를 지나 한참을 내려가야 군량밭(군량미를 쌓아놓던 곳)이란 마을이 나오고, 지금 폐교가 돼 인제교육청 야영장으로 쓰이는 군량분교가 있다.
필례식당 안주인 김월령(45)씨는 다섯살때 군량밭으로 왔다. 머슴살이가 비단살림에 비유되는 화전(火田)으로 산을 파먹고 살던 여덟가구가 지금은 모두 떠나고, 민박집들로 변했다. 소설에서 남자와 친구가 고시공부 하던 집은 애초에 없다. 작가의 상상이었을 뿐이다. 『고향인 강릉을 다녀올 때마다 저 길 너머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궁금해 하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만약 이곳을 다녀왔으면, 그 신비감이 사라져 소설의 무대가 되지도, 소설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이 끝나고 은비령을 찾았을때 그는 소설의 무대와 너무나 비슷함에 놀랐다. 상상이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은 은비령 뿐만이 아니었다. 바람꽃의 여자도 그랬다. 그가 지었다는 「은비팔경」. 은비령에는 삼형제봉, 주걱봉, 가리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삼주가병풍), 은색의 눈이 휘날려 나무가지에 쌓이고(은비은비·隱秘銀飛), 저녁에는 한석산 노을이 저녁을 알리고(한석자운·寒石紫雲), 아침이면 우풍재에 안개가 첫손님으로 찾아온다(풍령무진·風嶺霧陳). 필례골 얼음 속에는 맑은 물이 밤새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고(필동옥천·筆洞玉川), 밤하늘에는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와 남편의 친구를 사랑하게 된 여자가 2,500만년의 시간과 인연을 실어보낸 밝은 별이 찾아온다.
작가는 낡은 민박집을 걷어내고 지은 「은비령 찻집」 자리가 남자와 여자가 별을 보고, 어긋난 인연을 별에 묻고 떠난 곳이라고 했다. 그릇바닥 같이 깊고 감춰져 낯선 사랑을 시작하지도, 그 사랑을 이루지도 못할 것 같은 곳. 그렇지만 그 비껴가는 사랑을 별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하고, 또 다른 우주에서의 인연을 생각하게 하는 곳. 은비령은 이렇게 소설에서 「이름」과 「의미」를 얻었다.
이대현 기자
leedh@hk.co.kr
■은비령서 '바람꽃'을 만났다
작가는 「은비령의 바람꽃」이라 불렀다. 여자는 별을 이야기 했다. 『은비령을 넘다 차를 세워 별을 보곤 한다』고. 별을 보면 외로워지는지, 외로워서 별을 보는지 알 수 없다고. 작가는 소설속 은비팔경인 「은궁성라(銀宮星羅)」를 떠올렸고, 현실 속의 맑고 흰 그녀를 보고 또 한 편의 소설 「은비령」을 생각했다.
그대 은비령의 바람꽃을 보았는가.
썰매를 타듯 은비령을 내려가는데 작은 지프 한 대가 비껴 계곡 속으로 숨어 든다.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우리를 흘낏 쳐다보는 여자. 그녀에게서 바람꽃 냄새가 났다. 그 스쳐 지나간 바람꽃을 다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계곡이 끝날 쯤 「은비령 찻집」(0365_463_5566)이 있었다. 은비령에서 「은비령」이란 말과 공간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필례약수터 앞의 커다란 통나무집이다. 지난 8월에 지었다고 했다. 장작 난로가 있고, 산열매와 약초로 담근 술병이 있고, 은비령의 눈과 들꽃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바람꽃도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필례식당의 주인)가 딸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바람꽃, 스물여섯의 찻집 주인은 박수진이라고 했다. 속초에 있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고, 서울 어느 스튜디오에서 일하다 가족이 좋아, 은비령의 별이 좋아, 안개가 좋아, 이름모를 들꽃이 좋아, 눈이 좋아 돌아왔다고 했다.
「은비령」이라고 찻집 이름을 붙인 여자는 「은비령」의 작가를 만나보고 싶었고, 작가는 은비령에서의 만난 바람꽃이 너무나 반가웠다.
『3년전 40대 아주머니가 걸어서 이곳을 찾았다. 소설 속 은비령이 너무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를 오색까지 태워주고 나서 소설을 읽었다. 드라마도 봤다. 소설을 생각하며 찻집 이름을 「은비령」이라고 지었다. 고민을 많이 했다. 혹시나 작가에게 혼나지는 않을까』(바람꽃)
『이제 은비령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바람꽃」을 생각하고, 차를 마시고, 밤하늘을 보며 2,500만년의 시간을 이야기 할 것이다. 사실 「은비령」은 여기 한 번도 와보지 않고 지도만 보고 무대로 택했다. 신비하고 깊이 감춰진 곳이란 느낌과 무엇보다 고개에 이름이 없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소설에 마을이 나오지만 그곳은 저 아래 옛 화전마을이 아니라, 바로 여기이다. 3년전 처음 와봤다. 너무 놀랐다. 상상과 실제가 이렇게 밀착될 수 있을까』(작가)
『소설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인연」인데, 그것이 너무 어려워 가슴에 얼른 와닿지 않았다. 마지막은 너무 허탈하고』(바람꽃)
『독자들 반응도 그랬다. 마지막 그 인연을 분명히 맺어주지 않은데 대한 논란도 많았다』(작가)
바람꽃이 은비령의 느낌을 설명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하자, 작가는 『시간이 멎는 곳』이라고 얘기해주라고 했다. 여자는 서울을 떠나 30여년을 은자(隱者)로 사는 아버지의 「은비령」보다 더 깊은 사랑과 상처에 대해, 자신에게 찾아 올 인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작가가 「산우물」이라고 표현한 은비령의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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