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의 표준 직업분류가 새로 작성되었는데, 있던 직업이 사라지고 없던 직업이 생겨난 것을 보며 시대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타자수」이다. 회사마다 관청마다 타자기로 문서도 작성하고 차도 날라다 주던 여자들의 직업이 이제 역사가 되었다. 20세기 사람들에겐 편리함과 낭만의 상실일지 모르지만 21세기 시각으로 보면 진보일 것이다.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의 신년특집에 신문인과 은행인의 비위를 건드리는 기사가 실렸다. 그 유명한 보스턴컨설팅그룹의 필립 에반스 부사장이 21세기에 가장 위기에 처한 산업으로 신문과 은행업을 들었다. 디지털 네트워크로 이들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신세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대출 예금 카드발급등 은행의 각종 소매서비스는 앞으로 인터넷을 이용한 값싼 신종 서비스로 바뀔 것이라는 지적이다. 잡화점식 정보서비스를 하는 일간신문도 비슷한 길을 가게 되는데, 특히 신문사의 수입원인 광고가 인터넷의 발달로 몰락의 운명을 맞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인터넷 시대의 살생부(殺生簿)에 올라있는 산업은 비단 은행과 신문만은 아니다.
이 예측이 맞는다면 이런 몰락의 징후가 뚜렷해질 때의 은행과 신문사 종사자들은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그러나 앞으로 50년 후쯤 사람들은 은행보다 좋은 거래 서비스와, 신문보다 더 나은 정보 서비스를 받으며 살 수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박물관에 전시된 신문을 신기하게 구경할지 모른다. 21세기인들에게는 이 또한 인류문명의 진보라고 평가될 것이다.
정말 정신없다. 실리콘밸리의 한탕주의 벤처 열풍, 월스트리트의 머니게임, CNN의 밀레니엄쇼에 전세계가 춤을 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지구종말론도 넘겼고, Y2K재앙도 피했다. 공산주의의 소멸로 대규모 전쟁의 공포도 거의 사라졌다. 인터넷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몰고 올 신나는 삶의 변화와 호황의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런데 과연 인류의 미래는 밝은가 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21세기의 지평선 위에는 무지개를 띤 검은 먹구름이 떠오르고 있다. 한없이 끝없이 발전하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부의 창출이란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고 있지만 또한 인류를 환경재앙으로 유도하는 탐욕스런 소비문명을 촉진해 가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남북극의 빙하가 급속히 녹아 내리고 있지만 인간은 이를 막을 기술을 개발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화석연료를 줄이지도 못하고 있다. 인류가 긴급히 손을 쓰지 않는 한 21세기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예측되고 있다. 태평양의 도서국가들이 국제사회를 향해 피난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웃을 수 없는 심각한 메시지다.
세계 수천 곳의 연구소에서 유전자를 조작하고 있지만 그게 무병(無病)과 장수(長壽)의 세계를 만들지, 아니면 진짜와 가짜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복제(複製)사회의 대혼돈으로 인류를 끌고 갈지 예측할 수가 없다.
2000년 1월 1일 김대중 대통령이 광화문에서 열린 밀레니엄쇼에서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면서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 천년둥이는 타자수란 직업이 없어도, 은행과 신문이 없어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닷물이 불어 오르고 열파와 한파가 번갈아 침공하는 지구에서 이 아이가 피난갈 곳은 없을 것이다.
미국의 시장주의자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환경이 중요해지면 시장기능이 이를 해결해줄 것이다』 아주 일리없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과 지구환경의 임계점(臨界)는 다르다. 21세기는 생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지구는 생명을 키울 뿐 아니라 스스로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러브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김수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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