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 제시문은 현대문명이 빚어내는 부정적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는 원인을 분석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논술하시오. (1,800자 안팎으로 쓰시오)(가)몇 년 전, 패스트푸드 체인 맥도날드는 ‘우리는 당신을 위해 모든 일을 해드립니다’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맥도날드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한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음식이 나오면 식탁으로 가져가고, 식사가 끝나면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리고, 빈 식판을 제자리에 쌓아 놓는다. 노동비용이 올라가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소비자는 종종 더 많은 일을 한다. 샐러드바는 소비자를 부려먹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고객은 빈 접시를 산 다음, 샐러드바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그날 제공되는 여러 야채와 음식을 접시에 담는다.
이것의 장점을 재빨리 간파한 슈퍼마켓들은 매장 내에 소비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음식들을 세심하게 진열한 샐러드바를 설치했다. 이제 샐러드 애호가들은 샐러드 요리사가 되어 점심시간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고 저녁 시간에는 슈퍼마켓에서 일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패스트푸드점과 슈퍼마켓 입장에서는 아주 효율적인데, 여러 진열칸에 음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쓰는 종업원 한둘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많은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소비자들이 버거빵을 가지고 차림대에 가서 양상추, 토마토, 양파 따위를 넣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경우, 소비자들은 통상 일주일에 몇 분 동안은 샌드위치를 만드는 사람으로 일하게 되는 셈이다. 최근 버거킹을 비롯한 몇몇 프랜차이즈에서는 고객들로 하여금 빈 컵을 들고 손수 얼음과 음료수를 채우게 하는 혁신적 방식을 도입하였다. 이로써 고객들은 잠시 ‘음료수 판매원’으로도 일하는 것이다. 일부 초현대식 패스트푸드점에서는 고객이 컴퓨터 화면에 주문내용을 입력해야 한다. 이렇듯 패스트푸드점은 고객들을 부러먹음으로써 효율성을 제고해왔다.
(나)만화영화는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상상력의 대변자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만화영화에서는 기술적으로 동물이나 사물을 변형시키고, 거기에 나름의 가치나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제2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만화영화는 다만 ‘진리에 대한 기술적 이성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고 있을 따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만화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뒤엉킨 줄거리가 풀리게 되는 일관된 플롯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만화영화는 옛날의 광대극과 흡사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의 연관구조는 달라졌다. 첫 장면부터 모티프가 주어지고, 그것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파괴적 장면의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주인공은 그 이야기를 좇아가는 관객과 함께 무자비한 폭력의 재물이 된다.
즐거움을 위해 폭력장면을 늘린 결과 작품전체는 잔혹극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영화산업이 스스로 선정한 검열관들(이들과 영화산업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은 사냥놀이처럼 장황하고 적나라하게 전개되는 범죄장면을 지켜보고만 있다.
포옹장면을 볼 때의 감각을 새로운 템포에 익숙하게 하는 것 이상의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갈등을 희석시키고 모든 개인적 저항을 좌절시키는 것이 이 사회의 삶의 조건이라는 해묵은 교훈을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주입시키는 것이다. 만화영화 속의 도널드덕은 현실 속의 불행한 사람들처럼 채찍질 당하고, 그 결과 관객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처벌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겪는 폭력에서 느끼는 재미는 관객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되며, 기분전환은 중노동이 된다.
관객들은 아무리 눈이 피로해도 전문가가 자극제로 고안해낸 것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되며, 교묘한 속임수 장치들 앞에서 한 순간도 멍청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관객들은 장면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영화가 보여주고 권장하는 그럴듯한 반응들을 재빨리 연출하기까지 해야한다.
이런 점이 문화산업 스스로가 그토록 떠들며 자랑하는 긴장 이완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게한다. 라디오 방송국이나 영화관이 대부분 문을 닫는다고 하더라도 아마 소비자들은 별로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영화관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더 이상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러한 제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의 이용을 의무화하지 않는 한, 그것을 굳이 이용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문을 닫는 것이 반동적인 기계파괴운동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망하는 사람들은 열광자들보다는 모든 것으로부터 고통을 받기 마련인 우둔한 사람들일 것이다. 영화는 관객이 몰입하기를 바라지만, 관객인 가정주부는, 조용한 저녁시간에 휴식을 취하며 창 밖을 내다보듯이, 몇 시간 동안이나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도피처로 극장을 이용한다.
대도시의 실업자는 온도조절이 된 이 공간에서 여름에는 시원함, 겨울에는 따뜻함을 즐길 수 있다. 이런 기능을 제외한다면 잔뜩 비대해진 이 쾌락기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별로 보탬이 안 된다. 심미적 대량소비를 위해 이용 가능한 기술적 자원과 장치들을 ‘최대한 활용해야’한다는 생각은 경제체제의 일부에 속한다. 그런데 그 경제체제는 기아추방을 위해 자원을 활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우리 문화의 대부분은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기본적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심리적,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서 그 쟁점을 흐리게 연막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 연막중의 하나는 그러한 문제들이 너무나 복잡해서 평범한 개인은 파악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와 반대로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의 기본적 문제들은 대부분 너무나 단순하여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은 대단히 복잡해서 오직 ‘전문가’만이, 그것도 그 자신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제시된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불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개인은 혼란스러운 자료더미 속에 무기력하게 갇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전문가들이 찾아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애처롭게 기다릴 뿐이다. (중략) 비판적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는 또 다른 방식은 모든 형태의 체계적 세계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개개의 사실은 그것이 구조화된 전체의 부분일 때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성질을 상실하고, 단순히 추상적이고 양적인 의미만을 갖는다.
각각의 사실은 단지 또 다른 사실일 따름이고, 오로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라디오, 영화, 신문 등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파괴적인 효과를 갖는다. 어떤 도시에 대한 폭격과 수백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발표에 이어 거리낌없이 비누와 술의 광고가 나온다.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매력적이고 신뢰감있는 목소리로 중대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우리에게 길은 인상을 남긴 바로 그 아나운서가, 이번에는 그 뉴스 방송을 위해 돈을 지불한 특정 회사의 비누 품질이 좋다는 것을 청취자들에게 선전한다.
뉴스영화에서는 어뢰정(魚雷艇)화면에 뒤이어 패션쇼 화면이 나타난다. 신문은 신인여배우의 진부한 생각이나 아침식사 버릇을 과학계나 예술계의 중대 사건을 보도할 때나 똑같은 비중으로 진지하게 전달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들은 것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둔감해지고 우리의 감정과 비판적 판단은 방해를 받으며, 결국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밋밋하고 무고나심한 태도를 갖게 된다. ‘자유’라는 이름아래 삶은 모든 구조를 상실한다. 삶은 무수한 단편(斷片)들로 이루어진 것인데, 각각의 단편들은 서로 분리되어 전체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퍼즐을 풀어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개인은 단편들 속에 외롭게 남아있다. 그러나 둘의 차이는, 어린아이는 집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서 자기가 가지고 놀고 있는 작은 조각들에서 집의 각 부분들을 찾아낼 수 있지만, 어른은 단편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그 ‘전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는 당혹스럽고 두려워서 자기 앞에 놓인 작은 무의미한 단편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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