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한다. 항상 마음 속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어쩌면 여러분은 내가 나 자신을 학대하고, 내가 하는 일이 모두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꿈이 없는 그런 시대에 살고 싶지 않다』그래서 이 희극 배우는 언제 자살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무런 비장미나 주저함이 없이 오히려 웃으며.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일까. 「하나비」에서도, 「소나티네」에서도 기타노 다케시(北野武)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살로 인생을, 영화를 마감한다. 그것을 「인간 내면에 숨겨진 흉포성」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꿈이 없는 자의 가장 단순한 죽음의 표현방식.
그는 언제나 바다로 간다. 「하나비」의 주인공도, 「소나타네」의 야쿠자 조직원인 무라카와도 바닷가에서 자살한다. 바다는 그에게 자궁과도 같은 곳이다. 어머니의 치맛폭처럼 안락한.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연을 날리는 소녀를 만나거나, 스스로 어린아이가 돼 스모(일본씨름)놀이, 불꽃총싸움, 허방다리 만들기를 하며 무료한 하루를 보낸다.
웃음을 주지만 따라 웃기에 섬뜩한 그의 무표정. 여자가 있지만 그는 여자에게 희망을 품지도 않는다. 아내는 병들어 죽고, 여자의 기다림을 그는 허무하게 만든다. 오히려 「하나비」에서 그는 친구인 불구의 화가에게, 「소나티네」에서는 소도시 풋나기 야쿠자에게 희망을 기대한다. 그 휴머니즘조차 장난처럼 툭 던져버리는 가벼움.
93년 작품인 「소나티네」는 기타노 다케시의 야쿠자 이야기 3부작(1편은「그남자 흉포하다」, 2편은 「3_4*10월」)의 마지막이다. 야쿠자에게 시선을 돌린 이유는 그 세계의 비정함, 허무함, 야비함 때문이 아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주인공이 된 그는 클래식음악(소나티네)처럼 영화를 3악장으로 나눠 연주한다. 조직의 유지를 위해 행하는 빠르고 강렬한 폭력의 영상선율, 죽음 직전의 예식과도 같은 장난기, 그리고 배신한 보스를 죽이고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면 죽고 싶어진다』며 자동차에서 자신의 머리를 쏘는 또 다른 형태의 「할복 자살」.
그래서 영화는 과장과 감정 과잉에 대한 조롱이자 가장 일본적인 죽음관의 표현이다. 그 이질적 매력은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깊은 관조나 「러브 레터」이와이 순지 감독의 끈질긴 감성찾기보다 더 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기타노 다케시 영화를 편안하게 즐기지 못하게 한다. 그의 영화는 폭력조차 코미디 양식에 담지만 두렵고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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