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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무소유의 뒷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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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무소유의 뒷장

입력
2000.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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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새 아침 서울 성북구 성북동 요정 대원각 자리에 새로 생긴 길상사에서 고 김영한(金英韓) 할머니의 49재 의식이 있었다. 법정스님을 비롯한 불자들은 이날을 기해 환생했을 김할머니의 후생이 더욱 안락하고 복되기를 오래 빌었다. 분위기는 경건했지만 소박하고 간결한 의식이었다. 1,000억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고 홀홀히 떠나간 고인의 무소유 생활철학을 기리고, 뒤처리를 간소하게 해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99년 11월 16일에 있었던 장례식도 검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널찍한 묘역과 화려한 석물로 치장된 유택 대신, 그 날로 화장된 육신은 한줌 뼛가루로 남았다가 눈 내린 날 길상사 후원에 뿌려졌다. 눈 내리는 날 애타게 자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북의 시인 백 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못잊어 눈온 날의 산골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죽기 며칠전 『미스터 백 고생시킨 것이 필생의 한』이라고 고백했었다.

■백석과의 짧은 사랑을 잊지못한 그는 한평생 기생으로 살았다. 요정 운영으로 큰 돈을 벌었으나 어느 날 법정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명을 받아 1,000억원 시가의 대원각을 사찰용으로 기증했다. 70억원짜리 빌딩과 8억원짜리 한강빌라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장학기금으로 쾌척했고, 옛애인 이름을 딴 백석 문학상 기금도 내놓았다. 유일한 혈육인 딸에게조차 한푼 남기지 않은 철저한 무소유 철학을 실천하고 그는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의 49재가 끝나기 무섭게 유산싸움이 일고있다.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50억원을 내놓는다』는 유언을 근거로 KAIST가 길상사측에 유산 할양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길상사측은 조건없는 무상증여를 받아 등기이전까지 끝난 상태에서 고인이 그런 유언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KAIST측은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갈 의사까지 비치고 있다. 무소유 철학을 실천하고 간 고인의 유지를 더럽히는 돈싸움은 너무 민망하다. 싸우는 이들도 갈 때는 빈손일텐데….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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