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을 시작한다고 한껏 들뜬 1월 1일 0시 나는 서울 종로 거리의 한 극장에서 난데없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새로운 미래가 시작된다고 떠들썩한데, 나는 낡은 기차에 태워져 시간을 거꾸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입에는 어느새 박하사탕 하나가 물려져 있었다. 입안이 환해지면서 우리의 현실과 과거가 한꺼풀 물결처럼 여울져 밀려나고 있었다.마침내 여행이 끝나고, 나는 한참동안 심호흡을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침에 전주로 내려와 다시 한번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이 났어도 주인공 영호(설경구)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실은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은 과거가 되어버린, 내 가슴에 품었던 「지나간 미래」.
순진한 공장청년이 햇빛 밝은 날, 친구들과 강변으로 소풍을 나온다. 그는 첫사랑 순임(문소리)에게 쑥부쟁이꽃을 꺾어주고, 순임은 그에게 박하사탕을 준다. 그후 영호는 군대를 가고, 순임은 영호를 면회하러 간다. 그때가 80년 5월이었다. 순임이 면회온 날 영호는 출동명령을 받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박하사탕은 군화발에 무참히 깨진다. 영호는 광주로 투입된다. 그들의 애틋한 사랑도 깨어지고, 우리의 순진한 청년은 어떻게 변해가게 되었던가.
한 인간의 운명을 미리 알고서 그를 지켜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영화는 바로 그런 눈으로 우리 모두의 삶을 직시하게 한다. 「박하사탕」이라는 시간여행의 기차는 무서운 힘으로 시간의 벽을 정면으로 들이받아 깨뜨려 버린다. 역사는 유리창이 아니고 거울이니까. 거울은 유리 안쪽이 안보이니까. 깨져야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니까.
이 한편의 영화로 나는 우리에게도 영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숱한 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지만, 우리의 삶과 시대의 진실을 이렇게 서럽고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세기를 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라』고, 『우리가 이렇게 지난 날들을 살아왔다』고. 『피하지 말라』고. 『지난 시간을 가슴으로 받아 안아야 내일로 가는 희망이 있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인생,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랑, 한없이 가슴 아픈 「삶의 아름다움」. 그러나 「박하사탕」은 옛날로의 회귀를 꿈꾸는 영화가 아니라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 관한 영화이다. 주인공 영호의 볼에 흐르는 저 순수한 눈물은 지금 내 볼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인 것이다.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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